이병철 시인은 2014년 문예지 『시인수첩』의 신인상 시 부문, 『작가세계』의 신인상 문학평론 부문에 각각 당선돼 작품 활동을 시작한 젊은 문학인입니다. 그는 시 쓰기와 문학평론 외에도 강의, 낚시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창작의 고통과 삶의 무게가 다가올 때 어디론가 훌쩍 여행을 떠납니다.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자연을 만나고, 여행지의 정서와 감동을 사진과 글로 담고 있습니다. 더농부는 그가 풀어내는 ‘길에서 부르는 노래’를 격주로 전해드립니다. 젊은 시인이 한국의 명소와 맛집을 다니며 보고 느낀 것들을 함께 즐겨보시면 좋겠습니다.
볼락은 주로 동해와 남해에서만 만날 수 있다. 동해안이 볼락 낚시터라고는 하지만, 삼척 위로 올라가면 개체 수가 급감해 좀처럼 보기가 쉽지 않다. 수심이 깊고, 난류가 흐르며, 수중 암초가 잘 발달된 경북 동해안이야말로 볼락 낚시의 메카인 셈이다. 특히 겨울은 볼락 낚시가 호황을 이루는 계절이다. 1월 전후로 산란을 위해 연안의 해조류와 몰밭으로 몰려드는데, 방파제 테트라포드와 석축, 갯바위, 내항 어디서든 탈탈거리는 볼락 특유의 손맛을 볼 수가 있다.
낚시에는 흔히 세 가지 맛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손맛이고, 둘째는 눈맛, 그리고 셋째가 입맛이다. 볼락은 이 세 가지 맛을 모두 충족시켜주는 어종이다. 찌낚시와 선상 낚시도 많이 하지만, 볼락은 최고의 루어낚시 대상어다. 7피트 전후 울트라라이트 액션의 낭창한 낚싯대에 1000~2000번 소형 릴, 그리고 0.3~0.6호의 가느다란 합사 낚싯줄을 사용한다. 1~3그램 정도로 가벼운 지그헤드에다가 1.5~2인치 웜을 끼운 후 연안의 해조류 지대나 수중 암초 등 장애물 지형에 던져 느리게 릴링을 하면 후두둑— 하는 입질과 함께 돌 틈으로 처박으려는 달음질에 짜릿한 손맛을 만끽할 수 있다.
볼락과 함께 해돋이를! ⓒ이병철
그런데 이 손맛과 눈맛을 다 합쳐도 입맛에는 견줄 바가 못 된다. 나는 우리 바다에서 나는 생선 중 볼락이 가장 맛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회, 구이, 매운탕, 튀김…… 어떻게 요리를 해도 다 환상적이다. 얼마나 맛있으면 경북 동해안 지역 사람들은 ‘바다의 황태자’인 감성돔과도 바꾸지 않는다고 한다. 잡히는 족족 산지에서 다 소비가 돼 서울에선 맛보기도 어렵다. 가끔 구이나 매운탕을 하는 식당들이 있지만, 볼락회를 내는 곳은 보지 못했다. 싱싱하게 펄떡이는 볼락을 회로 썰어먹는 기쁨은 오직 동해안에서, 낚시를 통해서만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이맘때 포항의 겨울은 포근하고 부드럽다. 분홍빛 석양이 지는 저녁 수평선을 바라보며 채비를 던지면, 한 번은 볼락이 물고 올라오고, 또 한 번은 낭만이 걸려 올라온다. 채비를 던질 때마다 톡, 하고 입질을 하는 녀석들은 다 1년에서 2년까지밖에 아직 자라지 않은 ‘젖뽈’(작은 볼락을 칭하는 낚시꾼 은어)들이다. 열쇠고리만 한 어린 볼락들을 잡고 놔주고, 잡고 놔주고 하는 사이 드디어 ‘피딩타임’이 됐다. 물 속 암초와 테트라포드가 시작되는 물턱 자리에서 후두둑— 하는 시원한 입질이 연달아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달음질치면서 내 손에 짜릿한 진동을 안겨주는 볼락들은 20cm 전후의 완전한 성체, 포획 금지 체장인 15cm를 훌쩍 넘기는 놈들로만 골라 넣었는데도 살림통이 금방 찼다.
구룡포 호미곶온천랜드는 해수탕과 찜질방이 좋다. 여름엔 수영장도 운영한다. ⓒ이병철
찬바람에 고생한 손이 금방 거칠어졌다. 이제는 지친 몸을 쉬게 해야 할 때다. 구룡포읍 ‘신대천국밥’에서 돼지국밥 한 그릇 먹고, 구룡포 해수욕장 앞 카페에 가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줄인 말)을 마셨다. 그러고는 구룡포 초입의 ‘호미곶온천랜드’에 가 뜨거운 열탕에 몸을 녹이고, 수면실에서 한숨 푹 잤다. 낮잠에서 깨니 새벽의 볼락 낚시가 벌써 먼 옛날 일처럼 느껴졌다.
‘태풍펜션’은 방 안에 구룡포 바다를 품는 오션뷰다. ⓒ이병철
오후 낚시는 생략하고, 민박집에서 볼락 요리를 준비했다. 평소에는 뼈째 썰어 ‘뼈회’를 치지만, 볼락회를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다는 후배를 위해 이날은 포를 떠서 썰기로 했다. 볼락회 본연의 식감을 고스란히 느끼게 해주고 싶어서다. 회 뜨기에 적당한 크기로 몇 마리를 골라 손질했다. 사내 둘이서 술안주 삼기에 충분하다. 평소 뼈회를 좋아한다는 후배의 취향을 뒤늦게 알았다. 갈비뼈와 척추뼈 등을 발라낸 ‘서더리’를 칼로 탕탕 두드려 다진 다음, 참기름과 맛소금 넣고 버무려 뼈회다짐을 만들었다.
볼락회, 볼락회김밥, 삼겹살, 과메기로 차린 푸짐한 술상이다. 볼락뼈튀김은 별미 중의 별미다. ⓒ이병철
회만 먹으면 섭섭하다. 삼겹살도 구웠다. 고소한 냄새가 피어오르고, 입안에 침이 고였다. 처음 볼락회 맛을 본 후배는 “식감이 쫄깃하면서도 질기지 않게 부드럽고, 맛은 달다”고 호평했다. 후배에게 김밥에 초장 찍은 회를 얹은 ‘볼락회김밥’을 권했다. 볼락회김밥은 낚시꾼들에게만 허락된 별미. 후배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회도 맛있지만 볼락 요리의 하이라이트는 구이다. 회가 별미라면 구이는 진미다. ‘겉바속촉’하게 구워낸 볼락을 손으로 들고 한 입 베어 물자 나도 후배도 황홀한 표정. 후배가 외쳤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생선이 있었다니!” 한편 회 뜨고 남은 볼락 서더리를 삼겹살 기름에 튀겨내듯 굽는 볼락뼈튀김은 또 최고의 맥주 안주 되시겠다. 달달하게 취했더니 꿈결마저 꿀물이었다. 뒤척이지도 않고 아침까지 푹 잤다. 꿀잠이었다.
죽도시장 곰탕골목에 장기식당과 평남식당이 나란히 있다. 장기식당에서 고기는 야들야들하고 국물은 진한 소머리곰탕을 먹었다. ⓒ이병철
이튿날 아침, 민박에서 체크아웃하고 북구로 올라가 죽도시장을 갔다. 죽도시장에는 소머리곰탕 집들이 즐비하다. 유명한 집은 ‘장기식당’과 ‘평남식당’이다. 거의 비슷한데 평남식당은 곰탕에 수란을 얹어준다. 두 집 모두 문전성시라 주말에는 줄을 서 기다려도 못 먹고 돌아서기 일쑤다. 이날도 오전부터 줄을 길게 섰다. 회전율이 빠른 편이라 금방 자리가 났다. 특 사이즈로 주문해 맛있게, 배불리 먹었다. 오래 삶은 고기는 야들야들하고, 국물은 진국이다.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죽도시장은 먹거리만큼 볼거리도 많다. 어시장에서 거대한 개복치를 해체하는 광경은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대게와 홍게를 쪄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영포회센터를 지나, 과메기 난전을 지나, 돼지머리를 삶아내는 이바지 음식 골목을 지났다. 호떡 한 개를 사 먹고 집에 갖다 줄 디포리와 멸치, 미역을 샀다.
카페 ‘두 낫 디스터브’의 뜻은 ‘방해금지’다. ⓒ이병철
포항에는 근사한 카페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흥해읍 칠포리의 ‘두 낫 디스터브(Do not disturb)’를 첫손에 꼽고 싶다. ‘방해금지’라는 이름부터 맘에 든다. 이곳에서는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온전한 휴식을 즐길 수 있다. 두고 온 일상이 전혀 떠오르지 않을 만큼, 그저 순간에 머물게 해주는 풍경과 여유, 커피가 있기 때문이다.
카페 앞 산책로와 포토존에는 그리스 산토리니나 수니온을 연상시키는 하얀색 벽돌 조형물들이 놓여 있다. 조형물은 아침엔 바다의 푸르름과, 저녁엔 석양과 어우러지며 환상적인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국적 풍경은 눈에 쾌감을 선사하고, 카페 내부에 가득히 퍼지는 빵 냄새는 후각적 쾌감을 고취시킨다. 카페는 직접 구워낸 빵을 파는데 그 종류가 무척 다양하다. 말차라떼와 연유브래드가 특히 잘 어울린다. 갓 구워 따뜻한 빵을 한 입 베어 물어 빵의 고소함과 연유 크림의 달콤함이 입안에 진동할 때, 산뜻한 말차라떼 한 모금을 마신다. 마침내 미각적 쾌감까지 완성된다.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에서 노을을 봤다. ⓒ이병철
어느새 겨울 햇빛이 비단처럼 영일만을 덮었다. 동해면 임곡리의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을 찾았다. 2017년에 개장한 이곳 공원은 연오랑세오녀 설화를 주제로 ‘공간 스토리텔링’을 했다. 방문객들에게 지식적 유익함과 감성적 즐거움을 동시에 제공한다. 실내 전시관에는 다양한 체험 및 문화 시설이 마련돼있다. 전시관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서면 바닷바람은 팽팽하게 당겨진 수평선이 연주하는 현악 소리를 귀에 실어 나른다. 야외공원엔 쌍거북바위, 일월대, 신라마을 등 여러 볼거리들이 있지만, 무엇보다 근사한 것은 노을이다.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은 포항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을을 감상할 수 있는 장소다. 세오녀가 짠 명주 비단이 되찾아준 빛일까? 태양이 영일만을 온통 금빛으로 휘감는 시간, 석양 속에서 역광의 그림자가 된 젊은 남녀들은 말없이 사랑의 대화를 속삭였다. 이리 봐도 저리 봐도 너무 많은 연오랑세오녀들. 그 근처를 괜히 얼쩡거리다가 연인들의 기념사진을 망치는 ‘곤란한 정물’이 될까봐 우리는 자리를 피했다.
포항 북구 장성시장 영주식당은 고래수육을 판다. 맛이 일품이다. ⓒ이병철
포항 시내의 주말 저녁은 화려하다. 특히 영일대 해수욕장 주변의 불빛들이 휘황찬란하다. 그 불빛들을 뒤로하고 어두운 시장 골목, 허름한 옛 식당의 문을 열었다. 북구 장성동 장성시장 안에 있는 ‘영주식당’의 고래수육은 일품이다. 어떻게 삶아내는지 고래 특유의 냄새가 전혀 없고, 부위마다 다른 식감이 고스란히 살아 있다. 고래수육 한 접시는 미식 중의 미식이자 최고의 안주. 술잔을 비우다 보니 접시도 금방 비워졌다.
얼큰한 국물 생각이 나 찌개를 주문했다. 메뉴판에 없는 가자미 찌개가 상에 올랐다. 한 숟갈 떠먹자 붉은 고춧가루와 탱글탱글한 가자미살이 몸속에 동백꽃을 활짝 피웠다. 꽃은 아래에서부터 피어 위로 올라오기에, 식당을 나서서도 나는 두 볼에 동백꽃 동백꽃 발그레 매단 채 밤거리를 걸었다. 그날 밤에는 낡은 여관방 이불이 세오녀의 비단처럼 부드럽게 꿈속까지 감싸주었다.
글·사진=이병철(시인·문학평론가)
정리=더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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