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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 밤꽃 향기 – 전재욱 [제6회 추억의 우리 농산물 이야기 공모전 장려상]

김희중 에디터 조회수  

해마다 구시월이면 할머니는 어린 손자를 새벽부터 깨웠다. 그러고는 밤새 뒷산에 떨어진 밤을 주워 오라고 했다. 전북 김제에 있는 시골에서 유년기를 보낸 나는 일찍이 깨달아 알고 있었다. 저마다 역할을 해야 집안이 굴러가는 게 공동체 법칙이고, 그게 가족이라고 예외는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당시 초등학교에 들어가지 않았던 나에게도 해당하는 얘기였다. 힘이 덜 드는 축에 드는 밤 줍기는 내 몫이었다. 밖은 아직 까맸다. 랜턴 한 자루를 들고 어둠을 밀어내며 산을 오르는 게 내게는 일상이었다.

사람들은 내가 살던 동네를 밤나무 율(栗) 자를 써서 율리(里)라고 불렀다. 동네 야산에는 밤나무가 차고 넘쳤다. 가을이면 쓰러질 듯이 비틀거리던 밤나무가 생생하다. 굵은 밤톨을 가득 머금은 모습이 버거워 보였다. 그래서 땅에 떨어진 밤은, 밤나무가 살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친 흔적이다. 허리가 꺾이지 않으려고 밤새 밤을 털어냈을 테다.

이렇게 주운 밤은 창고 서늘한 데에서 항아리에 넣어 보관했다. 그러고 연중 필요할 때마다 꺼내어 썼다. 연간 십여 차례 제사를 지내는 우리 집에서는 밤은 없어서는 안 될 제수 음식이었다. 밤은 송이마다 밤톨이 세 알씩 들어 삼정승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래서 제사상에 올려 빌면 후손의 출세와 집안의 번영으로 이어진다고 믿는다. 할머니 손에 등 떠밀리기도 했지만, 내가 기꺼이 새벽에 산을 오른 이유는 이게 컸다. 가족이 잘되려면 내가 좋은 밤을 열심히 주워야 했다. 어깨가 무거웠다.

밤을 줍는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밤이 익는 시기는 추수기와 겹친다. 텅 빈 논에서 짚불을 지펴 구워 먹는 밤 맛은 먹어본 이만 안다. 이럴 때면 (부모가) 논을 가진 친구보다 밤을 가진 내가 더 주가가 높았다. 그런데 밤은 구울 때 반드시 대가리를 터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밤이 구우면서 터져 사방으로 튄다. 여기에 맞아 다치는 친구가 부지기수였다. 어른들은 밤 굽는 애들을 보면 꼭 이걸 조심하라고 했다.

물론 나는 이걸 잘 알기에, 밤을 구울 때면 친구에게 이로 밤 대가리를 까라고 일렀다. 그런데 밤을 까다 보면 가끔 벌레 먹은 밤이 나온다. 먹기에는 영 꽝인데, 겉으로 보면 멀쩡해 골라내기 어렵다. 이럴 때는 물에 밤을 넣고 떠오르는 걸 걸러내면 된다. 역시나 나는 이걸 잘 안다. 그래서 친구들을 만나러 가기 전에는 이렇게 가려낸 실한 밤을 들고 간다. 그래서 나와 함께 밤을 구워 먹으면 공짜인 데다가, 튀어 오른 밤에 맞아 다칠 리도 없었고, 벌레 먹은 밤을 먹지도 않는다. 우리는 누구 이로 대가리를 깐 건지 모르는 밤이 익으면, 누구랄 것도 없이 이빨로 까서 먹었다.

밤 유년기를 적다 보면 같은 동네 살던 스님을 빼놓을 수 없다. 새벽부터 불공을 드리는 스님에게 나는 상대가 안 됐다. 밤새 떨어진 밤은 대부분이 그의 몫이었고, 나는 스님이 훑고 간 산에서 빈 밤송이와 씨름했다. 할머니는 나를 이른 새벽부터 깨워 채근했지만, 별수 없었다. 어느 날은 오기가 생겨 이른 새벽에 올라 스님을 이긴 적이 있다. 치킨게임의 시작이었다. 이후로 나는 아무리 일찍 산에 오르더라도 스님을 이길 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로 전략을 바꿨다. 해가 지기 전에 산을 훑기로 한 것이다. 사실 산에서 밤을 수확하는 방법은 줍기만 있는 게 아니다. 장대로 밤나무를 털거나, 나무 망치로 밤나무를 때리면 밤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이 방법은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떨어지는 밤에 맞으면 꽤 따끔한데, 밤송이라도 맞으면 여간 묵직이 아픈 게 아니었다.

밤나무를 털고 있는 내게 스님이 다가왔다. 스님은 땅에 떨어진 밤이 가엽지 않으냐고 했다. 익은 밤을 따는 과정에서 덜 익은 밤까지 떨어진 걸 두고 한 말이다. 이런 밤은 영글지 못하고 썩어 없어질 수밖에 없다. 입을 벌리려고 한해를 기다렸건만 허사인 것이다. 말을 들어보니 밤톨이 가여웠다. 스님은 자기 밤을 몽땅 주고 돌아갔다. 덕분에 양파망을 밤으로 가득 채워서 돌아가 할머니에게 큰 칭찬을 받았다. 다음부터 스님은 새벽에 밤을 줍지 않았다.


※ 위 작품은 아그로플러스와 농촌진흥청이 공동주최한 ‘제6회 추억의 우리 농산물 이야기 공모전’ 수상작입니다.

글 = 전재욱 씨(추억의 우리 농산물 이야기 공모전 우수상)

정리 = 더농부

nong-u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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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중 에디터
fv_editor@fastview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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