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재 음식평론가는 한국 식문화를 외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비평가입니다. 식재료, 조리도구, 조리 문화, 음식과 관련한 문화 콘텐츠까지 우리가 잘 몰랐던, 혹은 우리가 쉽게 지나쳤던 것들을 친절하게 설명해 줍니다. 이용재 평론가는 격주로 더농부에 ‘식당과 음식 이야기’를 펼칩니다. 맛있는 한 끼에서 그가 얻은 통찰을 함께 나눠 보실까요?
‘풀 해(解)+속 장(腸)’ 해서 속을 풀어주는 국이니 해장국이다. 원래는 술을 마셔서 불편해진 속을 다스려 주기 위해 먹는 국이지만 살기 힘든 세상, 꼭 술을 마시지 않고도 속이 답답해질 일은 많다. 그래서 해장국은 본래 쓰임새보다 더 사랑을 받는다.
점차 사라져 가고는 있지만 많은 해장국집이 24시간 영업을 지향하는 것도 사랑받는 비결이다. 언제라도 뜨끈한 국물로 속을 풀어주거나 채워줄 음식점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설사 당장 찾아가지 않더라도 바쁜 현대인의 마음을 늘 뿌듯하게 채워준다.
마시는 술은 달라도 속 쓰림은 매한가지기에 우리에겐 참으로 많은 해장국이 있다. 일단 뽀얀 북엇국이 떠오른다. 부산처럼 해산물이 풍부한 지역에는 맑은 재첩국도 항시 대기 중이다. 개인적으로 우거지를 넣고 푹 끓인 선짓국을 가장 좋아한다. 고소한 선지를 푹푹 떠먹는 맛이 일품이다. 흐물흐물하게 익은 소의 내장을 씹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래서 종종 청진동의 청진옥을 찾는다. 매운맛은 한식에서 낄 데 안 낄 데 빠지지 않고 고개를 들이민다. 매운맛이 전혀 없는 국물이 이젠 귀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이곳 청진옥은 비교적 맑고 순한 국물이라 내 발걸음을 이끈다.
청진옥 선지해장국은 국물이 맑아 종종 방문한다. ⓒ이용재
청진옥은 1937년 이간난 할머니가 ‘평화옥’으로 문을 열었으니 85년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노포다. 비단 술을 먹지 않았더라도 잊힐 만하면 한 번쯤 찾는데, 이름과 역사를 자랑하는 노포치고 타성에 젖어 영업을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먹고 나면 늘 조금씩은 아쉽다.
국물은 조금만 더 진했으면, 선지는 조금만 더 부드러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진짜 불만은 김치에 있다. 전혀 간이 배지 않은, 그리고 단맛과 날 것의 무가 품은 매운맛이 도드라지는 김치는 간신히 전통을 지켜나가는 해장국 자체의 가치를 깎아내린다.
잘 익은 김치 신맛이야말로 해장국은 물론 한식 탕국의 균형을 잡아주는 중요한 요소다. 김치는 담그고 제대로 맛을 낼 때까지 드는 인적, 공간적 자원이 막대하다. 그러니 김치 신맛을 제대로 내는 곳이 정말 드물어졌다. 이는 김치가 유료 반찬이 되기 전까지는 개선하기 어려운 문제다.
이처럼 간간이 노포 청진옥에서 선짓국을 먹으면서, 강서구 화곡역 근처에 결이 비슷한 음식을 내는 곳이 있다고 해 찾아가 봤다. 상호마저 ‘청진동 해장촌’이라니 방문 전부터 왠지 믿음이 갔다. 그리고 선짓국을 받아보자 어느 정도는 그 믿음이 현실화되는 느낌이었다.
청진동 해장촌 선짓국은 국물에 매운맛이 있어 아쉬웠지만 선지가 야들야들해 훌륭했다. ⓒ이용재
쇠고기 양지로 냈을 거라 짐작되는 육수는 조금 묽었고 약간의 매운맛이 가미돼 아쉬웠지만 건더기 수준이 이를 상쇄하고도 남았다. 일단 푸딩처럼 야들야들함이 살아 있는 선지가 인상적이었고, 햐얗고 깨끗한 가운데 맺힌 곳 하나 없이 부드럽게 씹히는 양을 비롯한 내장도 훌륭했다. 국물과 건더기가 조금은 따로 노는 듯한 느낌을 받기는 했지만, 전체적인 완성도를 크게 깎아 먹는 수준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그래, 이만하면 괜찮지. 비교적 만족스럽게 뚝배기를 비우고는 다음 방문을 기약했다. 이 지면을 위한 음식의 평가는 정말 부득이한 사정이 아니고서는 늘 복수의 방문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2주 뒤, 나는 별생각 없이 다시 화곡동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소고기 털레기(‘온갖 재료를 흔데 모아 털어 넣는다’는 뜻)국을 먹어볼 심산이었는데, 버스를 내리니 신기하게도 음식점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자세히 살펴보니 그 자리에 다른 음식점의 간판이 붙어 있었다. 폐업인지 업종변경인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굳이 들어가 물어보는 것도 결례라 생각해 하지 않았다), 어쨌든 비교적 만족스러운 해장국을 먹었던 그 음식점은 사라진 것이다.
이렇게 허탈할 수가. 음식평론가로 활동한 지난 14년 동안 많은 일을 겪었다. 방문을 목표로 한 음식점이 어떤 이유에서든 문을 닫는 경우는 흔한 편이다. 폐업은 아닌데 세 번을 찾아갔는데도 문을 열지 않아, 삼고초려까지 했다면 충분하다며 다시는 찾아가지 않은 적도 있다. 하지만 다른 음식점으로 탈바꿈한 적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유가 뭘까? 저녁 식사 때에 맞춰가 주린 배를 쥐고 다시 버스를 타고 돌아오면서 나는 생각했다. 누가 뭐래도 속 사정은 장사를 하는 사람만 알 것이니 추측과 짐작일 뿐이지만, 대략 이런 이유들이 떠올랐다.
일단 음식값이 비쌌다. 기본 메뉴인 해장국 한 그릇에 1만원, 그것도 벽에 붙어 있는 메뉴판엔 9천원이었다가 요즘 치솟는 물가를 반영해 고쳐 쓴 흔적이 보였다. 게다가 공깃밥은 별도라 결국 한 끼를 먹는데 드는 비용은 1만1000원이었다. 평론가로서 음식의 수준과 가격 사이에 격차가 없다고 믿었지만, 나는 그저 가끔 찾아가는 한 사람일 뿐이다.
해장국 한 그릇에 다섯 자리의 값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지역 주민들이 받아들이지 못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또한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음식을 선택하는데 제 일 요소는 맛이 아니라 가격이다. 내가 먹은 해장국은 분명 1만원의 값어치를 하는 음식이었지만 다수에게는 아닐 수 있다.
오른 가격을 상쇄하려고 다양한 반찬을 내놨다. ⓒ이용재
내 생각에는 음식점도 이런 사실을 모르지 않았을 것 같다. 무엇보다 반찬의 가짓수가 시사하는 바가 있었다. 무와 배추김치 외에도 맛이 겹치는 무 간장절임과 아삭이 고추에 쌈장까지. 먹는 입장에서는 반찬이 많으면 횡재하는 기분이 들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왠지 오른 가격을 상쇄하려는 시도로 읽혔다.
한편 메뉴도 다양하다기에는 조금 번잡하고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해장국집으로서 기본인 해장국이 세 가지-뼈 해장국 포함-에 설렁탕과 도가니탕, 그리고 쇠고기가 아니라고 짐작할 수밖에 없는 감자탕이나 뼈탕도 있었다. 거기에 편육과 양무침, 도가니 수육도 있었다.
편육은 해장국과 결이 맞지 않는 메뉴다. ⓒ이용재
시험 삼아 시켜본 편육은 돼지 껍질을 가장자리에 둘러 만든, 수준이 괜찮은 음식이었지만 해장국과 결이 맞는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사람들의 심리가 미묘해서, 보통 탕국을 파는 음식점이라면 수육이나 편육 등이 호소력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해장국집이라면 이런 메뉴들이 정체성을 가늠하는 데 어려움을 줄 수도 있다.
원래 모든 음식 소개글은 궁극적으로 먹을 이들에게 장래의 선택을 위한 정보를 제공하는데 존재의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이야기가 다르다. 취재를 하는 가운데 음식점이 없어졌기 때문에 사실 고민을 많이 했다. 글을 써야 하는 걸까? 망설이다가 기록을 남긴다는 차원에서 글을 쓰기로 했다.
세상에 별처럼 많은 음식점이 존재하는 가운데 우리는 풍요 속 빈곤을 겪고 있다. 그만큼 갈 곳은 갈수록 적어진다는 말인데, 그런 현실 속에서 갈 만한 음식점을 이 ‘식당 탐구’ 코너에서 기록으로 남겨 두고 싶었다. 그래서 없어진 음식점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짐작한 이유를 덧붙여 글을 쓴다. 이런 음식점들을 발견할 때마다 조금 과장해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우리 입지가 조금씩 좁아지는 것은 아닌가 우려하게 된다.
청진동 해장국
서울 강서구 화곡동 403-1
폐업
글·사진=이용재(음식평론가·번역가)
정리=더농부
▽클릭 한 번으로 식탁 위에서 농부들의 정성을 만나보세요!▽
▽더농부 구독하고 전국 먹거리 정보를 확인해 주세요!▽
댓글 많은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