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고추장을 담그며 – 김미화 [제6회 추억의 우리 농산물 이야기 공모전 우수상]

태풍이 지난 자리에 희망처럼 누런 호박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우거진 호박잎 사이에 숨어 자라고 있었는지 애호박을 따러 드나들면서도 보지 못했다. 고마운 마음에 웃음이 났다.

남편과 복분자 농사를 짓기 시작한 지 3년이 됐다. 울타리 옆 호박도 심었다. 봄이 오면 복분자꽃이 하얗게 피었다. 여름이 시작되면 까만 열매도 달렸다. 밭에 들어서면 새콤달콤한 복분자 향이 가득했다. 복분자를 따서 설탕에 절였다. 큰 항아리에서 술 익는 냄새가 번졌다. 추석이 올 무렵 복분자청을 떴다. 새빨간 복분자청에서 발효가 잘된 와인 향이 났다. 맛을 보니 달콤했다.

투명하고 예쁜 병을 사서 색도 고운 청을 담았다. 고마운 사람들의 얼굴이 스쳤다. 한 병씩 담아서 선물도 했다. 귀한 선물을 받았다며 마음 고운 지인들이 활짝 웃었다. 가뭄이 심했던 여름 더위가 내 마음에서 식히고 뿌듯함이 번져왔다.

연휴가 길게 이어지는 10월이 왔다. 학교로 떠났던 아이들도 돌아왔다. 저녁을 먹고 아이들과 마주 앉아 호박을 긁었다. 반을 잘라보니 속이 노랗게 익어 은은한 호박 향이 났다. 숟가락을 하나씩 들고 네 쪽이 된 호박을 긁었다. 호박 속이 텅 비워졌다. 밤이 깊어 가고 가을비치고는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팬에 기름을 넉넉히 둘러 호박전을 구웠다. 고소한 기름 냄새가 빗소리처럼 집안에 퍼졌다. 노랗게 익은 호박전을 먹으며 “가을도 곧 끝나겠다”고 한참을 이야기하며 복분자청을 마셨다. 웃음소리가 청처럼 붉게 물들다 사라졌다.

남은 호박으로 고추장을 담기로 했다. 겨울이 시작되기 전 엄마는 늘 호박고추장을 담으셨다. 바람이 서늘해지는 날 학교를 마치고 긴 골목을 따라 집에 들어서면 엄마는 가마솥에 호박을 끓이고 계셨다.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런 날은 엄마가 고추장을 담그시는 날이다. 엄마가 허리 숙여 따 잘 말려뒀던 고운 고춧가루에 잘 익은 호박을 으깨 넣고 엿기름, 매실즙을 부어 마녀처럼 주걱으로 젓고 나면 달콤하고 매콤한 고추장이 되었다. 그 고추장으로 엄마는 멸치도 볶아주시고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닭볶음탕도 해 주셨다.

30년이 지나도 바람이 서늘해 마음마저 으슬으슬해지는 그런 날은 가마솥에서 끓던 호박 향이 감도는 것 같다. 가을이 오면 연기 자욱한 솥 앞에서 요리하던 엄마가 더 그리워진다. 남은 호박을 삶고 고운 고춧가루도 마련했다. 가스 불 위에서도 호박이 금방 익어갔다. 큰 통에 고춧가루를 붓고 매실청과 복분자청을 부었다. 안 그래도 빨간 고춧가루가 더 붉어졌다. 끓여 식힌 호박을 붓고 간을 해가며 주걱으로 저었다. 메줏가루까지 더해지고 어깨가 아플 때쯤 고추장이 완성됐다. 빨갛게 잘 익으면 무척 달콤할 것 같았다.

아이들에게 해 줄 고추장 요리가 머릿속으로 지나갔다. 갈치를 사 와 애호박을 따 넣고 갈치고추장찌개를 해줘야지 생각했다. 태풍을 피해 무사히 잘 익어준 호박이 몹시 고마웠다. 엄마와 행복했던 추억을 떠올리면 늘 엄마가 해 주셨던 음식 곁에 서 있게 된다. 고추장을 바라보며 나도 그런 엄마일까 생각한다. 아이들도 세월이 흐르면 내 생각을 하며 맛난 음식을 떠올릴까?

사실 나는 요리를 잘하지 못한다. 아이들도 외식을 더 좋아한다. 아이들이 내 생각을 한다면 엄마와 갔던 맛있는 음식점이지 않을까 걱정도 된다. 집에 온 딸에게 고추장을 맛보였다. 멸치에 고추장을 찍어 주었다. 고추장 맛을 본 딸이 깜짝 놀라 말했다.

“어머니 그냥 태양초 고추장 사 먹으면 안 될까요? 아주 신 맛이 나요.”

나는 “그래도 잘 숙성되면 아주 몸에 좋다”고 우겨봤다. 이런 날 엄마가 계셔 옆에서 긴 주걱을 저어주시고 비법을 알려주시면 고추장 맛이 한결 나을 텐데…… 언제나 나는 엄마가 그립다. 오늘은 요리하는 엄마 곁에 슬며시 가 앉고 싶은 가을이다.


※ 위 작품은 아그로플러스와 농촌진흥청이 공동주최한 ‘제6회 추억의 우리 농산물 이야기 공모전’ 수상작입니다.

글 = 김미화 씨(추억의 우리 농산물 이야기 공모전 우수상)

정리 = 더농부

nong-u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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