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재 음식평론가는 한국 식문화를 외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비평가입니다. 식재료, 조리도구, 조리 문화, 음식과 관련한 문화 콘텐츠까지 우리가 잘 몰랐던, 혹은 우리가 쉽게 지나쳤던 것들을 친절하게 설명해 줍니다. 이용재 평론가는 격주로 더농부에 ‘식당과 음식 이야기’를 펼칩니다. 맛있는 한 끼에서 그가 얻은 통찰을 함께 나눠 보실까요?
최근 희석식 소주의 역사에 대한 글을 쓰다가 무서운 사실을 알아버렸다. 2021년 기준, 한국 성인 1인당 소주 소비량이 연 52.9병이라는 사실이다. 1년이 52주이니 우리는 1주일에 한 병 이상 꼴로 소주를 마시는 셈이다.
그런데 글이 발간된 뒤 사람들의 반응이 한층 더 무서웠다. ‘나는 1년에 한 병도 소주를 안 마시는데 그럼 누군가는 100병이 넘게 마시는 셈 아니냐?’라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니 나도 소주를 그렇게 많이 마시지 않는다. 꼭 소주를 마시는 자리가 정해져 있으니, 거기에서 열심히 마셔봐야 1년에 열 병이면 많은 축에 속한다.
그렇다면 그 많은 소주는 대체 누가 다 마시는 걸까? 우리는 대체 소주를 왜 마시는 걸까? 소주가 우리의 음식과 잘 어울리기 때문에 이렇게 열심히 잔을 기울이는 걸까? 확신하고 ‘그렇다’고 답하기엔 자신감이 좀 딸린다.
일단 소주는 무엇보다 싸서 마신다. 오르는 물가에 음식점에서는 1병 4천원까지 올랐지만 그래도 가격 대비 알코올 도수가 여전히 높아 취하기 좋은 술이다. 말하자면 소주는 무차별적으로 한국 음식 문화에 파고들었으니 이제 음식과의 짝짓기 여부를 굳이 따지려 드는 것도 어찌 보면 무의미하다.
그렇다고 해서 고찰 자체가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싫든 좋든 소주도 음식과 문화의 일부이므로, 이왕 먹고 마신다면 최대한 즐길 수 있는 여건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래서 따져 보자면 소주는 중립적인 알코올에서 쓴맛과 단맛이 한쪽으로 조금 치우치는 술이다. 타피오카 등을 발효시켜 만든 주정에 맛의 균형을 잡느라 스테비오사이드 등 대체 감미료를 더한 결과물이다.
거기에 16~25도인 도수까지 감안하면 와인이나 맥주처럼 음식에 추가적인 수분을 공급해주는 용도로는 맞지 않는다. 그보다는 맛의 시너지 효과를 추구하는 술로 마셔야 하는 게 맞고, 원래의 맛을 감안하면 기본적으로 단맛이 너무 많이 깃든 음식과는 충돌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 요즘의 한식에서 단맛이 대세를 잡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사실 소주는 평균 주 1병씩 마시는 것만큼의 조화를 누리지 못하고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불균형이 심화한 한식의 지평 속에서도 놀라울 정도로 소주와 잘 어울리는 음식을 내놓는 곳이 있으니, 논현동의 한성칼국수이다. 상호에 붙은 ‘칼국수’를 보고 평범한 국숫집이라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러기엔 너무나 많은, 어쩌면 요즘의 현실에서는 잊히고 있는 한식을 선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선택의 폭이 다양한 가운데, 한식에서는 전채 요리 자리에 비교적 잘 어울리는 전류로 식사를 시작하는 게 적절하다. 대구를 필두로 굴, 애호박, 새우 등을 부쳐낸 전은 식기 전에 접시를 비울 수 있다면 완벽함에 매우 근접해 있다.
일단 재료의 맛이 고개를 들 수 있도록 밑간을 확실히 하고 나서 계란물을 입혀 야들야들함을 잃지 않도록 부쳐냈다.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전의 대부분이 가뜩이나 오래 지져낸 것을 주문받아 다시 한번 데워내 뻣뻣하고 기름에 찌들어 있음을 감안할 때, 한성칼국수의 전은 신기할 정도로 이상적인 형식을 현실에서 구현해 내는 드문 사례이다. 노로바이러스가 기승을 떨치는 현실을 우려해 약간 더 익혔나 싶은 굴전을 제외한다면 나머지는 ‘원래 이래야 한다’는 듯 신기할 정도로 부드럽다.
다음 ‘코스’로는 수육(쇠고기)와 제육(돼지고기)를 권한다. 전자는 양지머리, 후자는 삼겹살을 삶았는데 전과 이어서 먹는다면 질감의 낙폭이 크지 않은 가운데 맛의 변화만 극적으로 느낄 수 있다. 둘 다 맺힌 구석 하나 없이 야들야들한데 고소함과 감칠맛이 피어오른다.
다만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을 꼽는다면, 이 두 고기 요리와 최선의 짝을 이룰 수 있는 김치류 맛이 너무 다른 곳을 보고 있다는 점이다.
한성 칼국수에서는 세 종류의 김치가 상에 오른다. 나박김치와 배추김치, 부추김치인데 나박김치는 신맛이 잘 살아 있지만, 나머지 둘은 갓 무쳐낸 듯 맛이 전혀 어우러지지 않는 가운데 고춧가루를 비롯한 양념도 너무 진하게 돼 있어 음식 맛의 균형을 깬다.
전과 수육으로 입맛을 돋웠다면 주요리로는 낙지볶음이 최선의 선택이다. 위협적이지 않고 입맛만 돋울 정도로 빨간 색깔에 맞춰 맛도 점잖고 품위를 갖췄다. 굵고 시원시원하게 썬 양파와 풋고추는 뻣뻣함은 가셔내고 아삭함은 살렸으니 입에 넣고 씹는 재미가 훌륭하다. 한식 볶음에서 언제 이렇게 채소를 즐겁게 먹었나 싶은 정도이다.
한편 과조리 되기가 너무 쉬운 식재료인 낙지는 이에 최소한의 저항만 가도록 익혔다. 그리고 이 모든 재료를 혀끝에 살짝 찌르르하게 자극을 남기는 매운맛과 참기름의 고소함 및 풍성함으로 아울렀으니, 이전까지 모종의 이유로 참고 견뎠다고 하더라도 소주를 안 마시고는 배겨낼 수 없게 만든다. 그렇다, 여태껏 소주를 마시지 않았다면 그건 잘못된 선택이다.
식사의 마무리를 한식답게 탄수화물로 마무리하고 싶다면 몇 가지 선택이 있다. 일단 낙지볶음에 칼국수면을 추가할 수 있다. 손으로 뽑은 것 같지는 않지만, 비정형성이 제법 남아 있는 면은 낙지와 채소에 부드러움으로 질감의 멍석을 잘 깔아주는 한편 볶음 양념을 잘 빨아들여 음식으로서 완결성을 한결 높여준다. 따라서 낙지볶음을 안 시킨다면 모를까(아마도 후회하겠지만), 시킨다면 면 추가를 하는 게 현명한 처사이다.
한편 배가 적당히 불렀지만 안주가 부족하다면 빈대떡을 권한다. 가장자리는 바삭하고 속은 부드럽도록 잘 지져낸 거야 두말할 필요도 없는 가운데, 분명히 잘 익은 김칫국물로 맞춘 것 같은 간이 훌륭하다. 기름진 빈대떡 자체의 균형을 잘 잡아줄 뿐만 아니라 소주(이 시점에선 안 마시는 게 이상할)의 안주로서 한성 칼국수의 메뉴 가운데 최선이다.
마지막으로 낙지볶음에 사리까지 먹었는데 아주 조금만 더 채워줬으면 좋겠다는 경우라면 만두를 권한다. 대부분의 냉면이나 국숫집에서 내는 왕만두가 아닌, 중식당의 물만두처럼 자그마하면서도 소의 고기 입자가 자기주장을 확실히 해 부담스럽지는 않으면서도 만족감은 느낄 수 있다. 상황에 따라 접시만두는 물론 뜨끈한 만둣국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이다.
희석식 소주가 최선의 술이라고는 하기 어렵다. 먹을 쌀도 부족했던 시절, 국가의 지원을 통해 궁여지책이 대세처럼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 대강 마셔야 하는 건 아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는 말이 있듯 희석식 소주를 피할 수 없다면 즐길 방안을 모색해봐야 한다. 소주의 특성을 감안하면 사실 드센 매운맛과 단맛의 질긴 음식보다 짠맛과 감칠맛의 균형이 잘 잡힌 부드러운 음식이 잘 어울리고, 한성칼국수는 드물게도 그런 음식을 내는 곳이다. 따라서 열심히 즐기는 한편 이런 음식을 내는 가게가 드문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성칼국수
02-544-0540
서울 강남구 언주로148길 14
청호상가빌딩 가동 2층
<메뉴>
수육(소) 3만원
제육(소) 2만7000원
모듬전(소) 2만6000원
낚지볶음(사리추가) 4만2000원
빈대떡 1만1000원
칼국수 1만1000원
만둣국+밥 1만1000원
접시만두 1만원
<영업시간>
월~금요일 오전11시30분~오후9시50분
(휴식시간 오후 3~5시)
일요일 오전11시30분~오후9시30분
오후 8시 마지막 주문
(휴식시간 오후 3~5시)
매주 토요일 휴무
글·사진=이용재(음식평론가·번역가)
정리=더농부
▽클릭 한 번으로 식탁 위에서 농부들의 정성을 만나보세요!▽
▽더농부 구독하고 전국 먹거리 정보를 확인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