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진의 귀촌 일기 39] 우리 초등학교가 폐교를 한대!

추석도 다가오니 오랜만에 마을 분들과 함께 식사를 하기로 했다. 여느 시골처럼 연로하신 분들이 대부분인 마을이다 보니 코로나가 유행한 이후로는 감히 함께 모여 식사를 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우리 마을은 예전에 누에를 키우던 분들이 모여 살던 곳으로, 넓은 면적에 비해 살고 있는 가구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내가 이곳으로 이사를 오던 때만 해도 예전의 흔적이 남아있었으니, 집 주변 여기저기에 뽕나무들이 흩어져 있었고 멀리 언덕 위에는 누에를 키우던 잠사도 몇 채 보였었다.

멀리 언덕 위에 누에를 키우던 잠사가 보인다. ⓒ윤용진

마을이라고 해 봤자 가구 수는 전부 15집뿐이었다. 마을 주민들 대부분은 이 지역 출신으로 서로 혈연과 지연으로 똘똘 뭉친 끈끈한 관계였다. 낯선 시골에 가면 텃세가 심하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어온 터라, 과연 이런 마을에서 우리 부부가 잘 버텨낼 수 있을지 걱정도 많았었다. 하지만 예상외로 마을 주민들은 우리 식구를 따뜻하게 받아들여 주셨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마을 제일 어른이셨던 할아버지께서 “우리 동네에 젊은 사람이 들어왔으니 잘 들 도와줘!”라고 엄포까지 놓으셨다고 한다. 그 당시만 해도 아이가 있는 40대 중반의 젊은 부부였으니, 젊다는 것만으로도 우리 부부가 예쁘게 보였을 것 같기도 하다. 덕분에 텃세란 것도 겪지 않고 지금까지 잘 살고 있는데, 다만 17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도 마을에서 제일 막내란 사실이 조금은 아쉽다.

그 때만 해도 한 달에 한 번은 마을 주민들이 다 같이 모여 식사를 하곤 했었다. 매달 조금씩 걷은 회비로 음식을 준비했고, 봄부터 가을까지는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에 만들어 놓는 평상에서 다 같이 식사를 했다. 30여명의 마을 분들이 모여 북적거리던 그 때에는 제법 사람 사는 맛이 났었다. 우리 부부야 워낙 생소한 환경인지라 눈만 껌벅거리고 있었지만, 마을 돌아가는 얘기부터 각 집안의 대소사까지 별의별 이야기가 다 나왔던 것 같다.

순식간에 땅을 파헤치더니만 공장이 들어섰다. ⓒ윤용진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큰 공장이 들어온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한동안 온 마을이 땅 매매 얘기로 시끄러웠고, 일 년도 채 안 되어 마을 주민들 절반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 ​마을에 남아있던 뽕나무나 커다란 은행나무들은 전부 뽑혀버렸고, 순식간에 큰 공장이 들어섰다. 원래 빈자리가 더 커 보이는 법이라고, 갑자기 절반으로 줄어든 마을 모임은 명맥만 유지할 뿐 생기를 잃어갔다.

그렇게 10여년의 세월이 흐르며 마을에서 제일 어른이셨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형님 한 분은 먹고살려면 농사보다는 차라리 공장 경비가 더 낫겠다며 마을을 떠나셨다. 현재 우리 마을에는 5가구만 남아 있는데, 연령대를 보면 80대가 2가구, 70대가 2가구, 그리고 제일 막내인 60대 우리 부부가 살고 있다.​

최근에 소멸 도시라는 말이 꽤나 자주 들린다. 시골에서는 먹고살기가 어려우니 젊은 사람들을 모두 도시로 떠나간다. 농사를 짓는 것도 이제는 한계에 부딪힌 것 같다. 소규모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야 그렇다 치지만, 대규모로 농사를 짓는 분들도 먹고 살기에 빡빡한 것은 마찬가지인가 보다.

봄에 고구마를 심는 모습. 고구마를 심으려면 일손이 많이 필요하다. ⓒ윤용진

우리 집 앞 언덕에서 고구마 농사를 짓고 계신 분을 자주 만난다. 그간 고구마는 심어만 놓으면 저절로 자라는 작물인 줄 알았는데, 제대로 키우려면 해야 할 일들이 많은가 보다. “고구마 순이 무성하면 고구마가 작아지니 순 억제제를 쳐야 해요. 올해는 비가 계속 와서 약을 4번이나 쳤다니까요!”

최근에는 한숨을 쉬며 말씀하셨다. “인건비가 워낙 올라서 이제는 고구마 농사도 못 짓겠어요!” 그 분은 20만평이나 되는 땅에 고구마 농사를 짓는데, 작년에 처음으로 적자를 봤다고 하신다. “인건비도 올랐지만 마음대로 사람을 구할 수도 없어요. 내년에는 차라리 콩이나 심을까 해요. 콩은 장비만 있으면 되거든요!”

지방에도 아파트가 들어선다. 그래도 저곳에는 아이들이 많겠지? ⓒ윤용진

오랜만에 함께 하는 식사인데도 네 부부만 모였다. 80대 중반에 접어든 아저씨께서는 최근에 기력이 많이 떨어지셨는지 거동을 하기가 힘들다고 하신다. “올봄만 해도 뒷짐을 지고 다니셨는데….” “요즘 통 안 보이셔서 어째 이상하다 했어요.” 머지않아 우리 모두에게도 닥칠 일이라는 생각에 갑자기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식사 끝나고, 다 같이 찾아뵙기로 합시다!” 마을 회장님이 말씀하셨다.

명절을 맞이하여 기뻐해야 할 식사 모임인데 어째 분위기가 점점 더 이상해지고 있었다.

“우리 읍내에 남은 마지막 초등학교인데 이제 폐교를 한 대!” 88년의 역사를 지닌 학교이다 보니 이곳에서 사시는 분들 대부분은 같은 초등학교 동문이시다. 해마다 초등학교 동문 체육대회를 하면 거의 마을 주민 모두가 참석을 한다고 떠들썩하곤 했다. “전교생이 50여 명뿐이래. 교장 선생님 포함해서 선생님도 14분이고. 우리 읍내도 이제 다 된 모양이야!” “애들이 없는 걸 어쩌겠어!”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래도 내가 사는 지역은 인구 ‘소멸지역’까지는 아니라고 하던데, 우리 읍내는 예외인가 보다. 그나마 남아 있는 학생들 대부분도 다문화 가정 출신이라고 한다. 이따금 읍내에서 보이는 젊은 사람들은 외국에서 이주해온 분들뿐이다. 예전에는 인구가 만 명도 넘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기도 어렵다.

소멸해가는 지방 도시를 살릴 수 있는 방안이 정말 없는 걸까? 국가 전체가 고령화되고 출산율이 떨어져 위태로운 판에 시골까지 신경을 쓸 겨를이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시골의 공동화 현상 역시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다. 이미 소멸의 길로 들어선 지방 도시는 특단의 조치 없이는 결코 회복될 수 없고, 어쩌면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요즘은 시골에 빈집이 부쩍 많아지고 있다. ⓒPixabay

추석도 예전 같지가 않다. 명절 때가 되어도 거리는 휑하기만 하다. 추석이라고 고향을 찾는 낯선 차가 이따금 보이기도 하지만, 하루만 지나면 다시금 도시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러면 나이 든 부모들은 유난히도 텅 빈 집에서 자식들이 찾아 올 다음 명절을 손꼽아 기다리겠지.

우울한 분위기를 바꾸겠다고, 그동안 모아놓은 마을 기금으로 가구마다 작은 선물을 하나씩 사 드리기로 했다. “그래도 즐거운 명절이잖아요!” 이럴 때면 60대 막내 부부가 애교라도 떨어야 한다. “그건 그래. 힘들 내자고!”

“명절 잘 보내세요!” 다들 웃는 얼굴로 헤어지기는 했지만, 마음 속 한 구석에는 왠지 모를 공허함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다 나이 탓인가? 이젠 명절도 마냥 즐겁지만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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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윤용진(농부·작가)

정리=더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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