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두세 번 오고 기온이 영하로 내려갔다고 우리 집은 겨울 왕국이 되어버렸다. 집만 얼어붙은 게 아니고 우리 집 주변의 온 세상이…. 외출했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2차선 도로로 접어들면 갑자기 온통 흰 눈으로 뒤덮인 세상이 펼쳐진다. 큰 길에 쌓인 눈은 제설차가 치워주었지만, 집으로 들어가는 200미터나 되는 긴 도로에는 아직도 눈이 쌓인 채 그대로다. 이 눈들은 특별히 날씨가 따뜻해지지 않는 한, 아마도 봄이 되어서야 사라질 것이다.
“시골에서는 눈을 직접 치우지 않나요”라고 궁금해하실지도 모르겠다. 물론 눈을 직접 치운다. 하지만 시골에서는 웬만큼 눈을 치워서는 티도 나지 않는다. 집 앞뒤 마당에 쌓인 눈도 한쪽으로 밀어놓고, 마당으로 들어오는 입구의 눈도 치워야 한다. 매번 눈을 치우면서 느끼는 건데, 자갈이 깔린 마당은 눈을 치우기도 어렵다. 이렇게 집 안팎에 쌓여있는 눈만 치워도 이미 땀이 나고 숨을 헐떡거린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전초전이고, 이제 200미터나 되는 긴 2차선 도로의 눈이 남아있다.
힘도 의욕도 넘치던 귀촌 초기에는 도로의 눈을 치우기도 했다. 물론 도로 전체의 눈을 치웠던 건 아니고 차바퀴가 지나갈 자리만 골라서…. 하지만 도로가 길다 보면 그것도 만만치가 않은 일이다. 젊었을 때는 그렇게라도 눈을 치우며 살았는데, 힘이 달리고 꾀만 늘은 지금은 한숨만 쉰다. “트랙터만 있으면 순식간에 눈을 치울 수 있을 텐데….” 눈만 오면 늘 있지도 않은 장비를 아쉬워한다. 뾰족한 대안이 없는 현실에서는 그냥 차를 살살 몰며 눈길을 다니고. 젊은 사람이 없는 우리 마을에는 시골에서 볼 수 있는 그 흔한 트랙터도 없다.
시골의 도로는 도시와는 다르다. 집은 띄엄띄엄 떨어져 있고, 길은 논밭을 따라 거미줄처럼 엉켜있다. 그래서 제설 차량은 큰 도로만 치워주는 정도이고 나머지는 각자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 그나마 마을에 트랙터가 있으면 마을 길에 쌓인 눈을 치워주기도 한다. (시에서 트랙터에 부착하는 제설기와 유류비 등은 지원해 준다고 한다.) 하지만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곳에 살고 있다면, 웬만큼 친한 사이가 아니라면 그곳까지 눈을 치워주지는 않는다.
대부분 시골의 마을들은 햇빛이 잘 드는 아늑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도시에서 시골로 내려온 분들은 평지보다는 전망이 좋은 곳을 선호하는 것 같다. 내 주위에도 언덕 위에 집을 짓고 사시는 분들이 많다. 그분들 집에 가보면 과연 탁 트인 전망이 끝내준다. 먼 산도 보이고, 마을도 내려다보인다. 멀리 저수지가 보이는 집도 있다. 다만 그곳에 가려면 좁은 시멘트 길을 따라 언덕을 올라가야 한다.
처음에는 다소 걱정이 되어 물어봤다. “혹시 겨울에 눈이 오면 어떻게 해요?” “아! 걱정 없어요. 마을에서 트랙터로 눈을 치워주거든요!” 또는 “햇빛이 잘 드는 길이라 눈이 금방 녹아서 괜찮아요!”라는 대답이 돌아오곤 했다. 그래서 정말 괜찮은 줄 알았다. 그런데 세월이 흐른 지금은 다른 말씀을 하신다. “눈이 오면 마을에 차를 세우고, 등산화로 갈아 신고 집으로 올라가요!” “아예 차에 아이젠을 갖고 다닌다니까요!” 정작 내가 필요할 때 눈을 치워주는 건 아닌가 보다. 더구나 눈은 시간 맞춰 오지도 않는다.
시골에서 살려면 길도 좋아야 하지만 집도 따뜻해야 한다. 그러려면 당연히 햇빛이 잘 드는 곳에 집을 지어야 하고, 단열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시골집은 웬만큼 단열을 해서는 아파트만큼 따뜻하지도 않고, 난방비도 도시의 아파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먹힌다. 경치가 좋다거나 넓은 집은 각자의 경제력에 따라 선택할 사항이지 필수 요건은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당연한 사실을 직접 살아보기 전에는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다.
요즘 유럽에서는 전기세 폭등으로 추위에 떨며 지낸다고 한다. 전기세가 무려 10배까지 상승할 거라니 과연 무시무시하다. 그런데 남의 일만은 아닌 것 같다. 대부분의 시골집에는 기름보일러가 설치되어 있는데, 최근에 난방용 등유 가격이 50% 넘게 올랐다. 기름값이 무서워서, 전기장판 켜놓고 외투 걸치고 사시는 분들도 많다. 그나마 심야전기보일러가 설치된 우리 집은 다행이라 생각했었는데, 올해 큰 폭으로 전기세가 인상된다고 하니 은근히 걱정이다. 앞으로는 지금보다 더 춥게 살아야 하나?
누가 나에게 일 년 중 가장 좋아하는 계절을 물으면 겨울이라고 대답을 해왔다. 시골로 내려온 이후 한 번도 바뀌지 않고 줄곧 겨울이 좋다고 말을 해왔다. 겨울에는 힘들게 풀을 깎지 않아도 되고, 과수원에서 일을 하느라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또 겨울이 되면 그 무엇에도 매이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살 수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앞으로는 겨울만 아니라면 다 좋을 것 같다. 추운 겨울만 아니라면 치솟는 난방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고, 이렇게 웅크리고 지내지 않아도 될 테니까 말이다. 더구나 날씨가 풀리면 사과나무들을 베어버릴 예정이니 앞으로는 과수원에 매여 살지 않아도 된다.
눈 내리는 겨울이 되면 영화 <닥터 지바고>가 생각난다. 온통 흰 눈으로 뒤덮인 들판에 외로이 서 있는, 얼음궁전이라 불리는 대저택이 떠오른다. 그 대저택에서 ‘지바고’는 한밤중에 일어나 손을 호호 불며 ‘라라’에게 바치는 시를 쓴다. 나도 긴긴 겨울밤이 되면 손을 호호 불며 컴퓨터 앞에서 글을 쓴다. 다만 차이라면 우리 집은 대저택이 아닌 헛간(지바고 부부가 한동안 살았던 헛간) 규모이고, 애틋한 사랑의 시 대신 나는 에세이를 끄적거리고 있다.
오늘 아침도 기온이 영하 18도까지 내려가더니만 집안이 춥다. 정말 겨울 왕국에 살고 있는 것처럼 춥다. 하지만 심야전기 팍팍 돌렸다가는 폭탄 맞을까 봐 무서워 두꺼운 옷을 껴입고 산다. 특히 추위를 많이 타는 아내는 내복에 두꺼운 파카까지 껴입고 지낸다.
창밖에 하얀 눈이 쌓이면 우리 집은 겨울 왕국이 된다. 집만 그런 게 아니라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도. 아내는 <겨울 왕국>의 안나를 좋아한다. 아내는 하얀 눈을 보면 마음은 소녀가 되어 안나의 노래를 부른다. 나는 눈 치울 걱정에 한숨을 쉬는데, 아내는 뭐가 좋다고 오늘도 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안을 돌아다닌다. 특히 동생 안나가 문을 두드리며 엘사를 부르는 노래를.
Do you wanna build a snowman? (눈사람 만들지 않을래?)
Come on, Let’s go and play. (어서 나가서 놀자)
…
No! No! (노! 노!) 이 추운 날씨에 얼어 죽을 눈사람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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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윤용진(농부·작가)
정리=더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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