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진의 귀촌일기 44] 애증의 사과 과수원

사과를 수확하는 내내 머릿속이 복잡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가을에 비가 계속 내리더니만 빨갛게 물들지 않은 사과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농사꾼에게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게 가을비라고, 단풍이 들기 시작할 9월에 비가 계속 내렸으니 잎들은 마치 봄을 맞은 양 다시 초록색을 띠었다. 당연히 사과도 오랫동안 녹색을 머금었고. 가을비로 피해를 본 게 벌써 몇 년째이니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한두 해 짓는 농사도 아닌데 어째 올해는 힘이 더 드는 것 같다. 나이를 한 살 더 먹어서인지, 아니면 올해 농사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아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나도 꽤나 오랫동안 농사를 지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시골로 내려온 것이 2006년 5월이었으니 이미 16년 하고도 6개월이 지난 셈이다. 2006년 가을에 땅을 구입했고, 본격적으로 농사를 시작한 것은 2007년 봄부터였다. 그 당시는 집을 짓기도 전이라 밭으로 출퇴근을 해야 했는데, 제일 먼저 사과 과수원부터 만들었고 밭 한쪽 귀퉁이에서 텃밭농사를 시작했다.

9월에 계속 비가 내리니 단풍이 들어야 할 잎이 다시 초록색으로 변했다. ⓒ윤용진

여유롭게 살자고 내려온 시골이었고, 무엇에든 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살고자 했다. 언제든 내가 원하기만 하면 훌훌 털어버리고 가버리면 그만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막상 시골에서 자리를 잡자 만만치 않은 농촌의 일상이 현실로 다가왔다. 물론 도시에서 직장을 다닐 때보다는 훨씬 여유로웠지만 그렇다고 언제든 내 마음대로 살아갈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이따금 사람들이 “물 좋고 공기 좋은 시골에서 텃밭과 과수원을 가꾸며 사는 모습이 부러워요!”라고 말씀하신다. 우리 집이 겉으로는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솔직히 내 삶을 평가하자면 절반만 맞는 말씀이시다. 앞에서는 부러워 보일지 몰라도, 뒤에서는 농사짓느라 허덕이며 살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빨갛게 물든 사과들. 여기 저기 색이 덜 든 사과들이 보인다. ⓒ윤용진

텃밭농사는 그래도 여유가 있었다. 농사 규모가 그리 크지도 않았고, 문만 열면 바로 보이는 텃밭이니 언제든지 내가 원할 때 일을 하면 되었다. 텃밭에서 온갖 작물들을 키웠고, 거의 모든 양념과 채소를 자급할 수도 있었다. 어쩌다 큼직하게 자란 배추나 먹음직스러운 브로콜리를 지인들에게 자랑할 때면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했다.

텃밭 농사는 한 해를 망쳐도 그만이었다. 워낙 다양한 품종을 텃밭에 심다 보니 농사 전체를 망칠 일도 없었지만, 설사 망치는 작물이 있더라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채소를 키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고, 딱히 투자한 비용도 없었으니 망해봤자 손해랄 것도 없었다. 지나고 보니 텃밭 농사를 지으면서 스트레스를 받았던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지금도 텃밭농사는 은퇴 후 취미생활로도 꽤나 괜찮다는 생각을 한다.

최근에는 과수화상병으로 이른 봄부터 방제를 시작해야 했다. ⓒ윤용진

문제는 과수원이었다. 과수원은 한순간도 방심할 수가 없었다. 2월 말이면 벌써 전지를 시작하고, 일 년 내내 방제와 온갖 필요한 작업을 하고, 11월 중순이 되어서야 사과 수확이 끝난다. 다른 과수들은 9월이면 마무리를 하는데 유독 사과만큼은 일 년 내내 과수원에 매여 있어야 한다. 전문성도 필요하고, 해야 할 일도 많고, 판로도 고민해야 하고, 심지어는 날씨 걱정까지 하며 살아야 했다.

상품성 있는 사과를 만들기 위해 들어가는 농자재 값도 만만치가 않았다. 특히 올해는 농자재 값이 거의 30%나 올랐으니 자칫 잘못하면 본전을 건지기도 힘들다. 사과 과수원은 텃밭처럼 한 해를 쉴 수도 없다. 조금만 신경을 쓰지 않아도 순식간에 병이 퍼지고, 한 해만 내버려 두면 차라리 폐원을 하는 게 더 나을 정도로 나무가 망가져 버린다.

그렇다고 소득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손바닥만 한 과수원에서 팔자 고치려던 것도 아니지만,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얻었던 적도 없다.

낙엽이 지고 있는 사과 과수원. 이제 한 해 농사가 끝났다. ⓒ윤용진

농사는 규모의 경제가 필요한 분야다. 자급용의 텃밭 농사라면 몰라도, 수익을 올리기 위한 농사라면 어느 정도 규모가 되어야 한다. 규모가 커야 농기계를 투입하고 효율적으로 일을 할 수가 있다.

과수원이 크면 방제를 할 때 승용 SS(Speed Sprayer)기를 사용하지만, 작으면 긴 줄을 끌며 분무기로 방제를 한다. 또 규모가 크면 농사용 사다리차나 동력운반차를 사용하지만, 반대로 작으면 사다리를 타야 하고 외발 수레로 사과를 날라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 집은 이렇다 할 농기계도 없이 우리 부부의 힘만으로 과수원을 일구었다. 일손이 급할 때면 때로는 지인들이 도와주기도 했지만, 비용을 지불하고 일손을 빌린 적은 없다.

사람들은 과수원 규모가 작으면 해야 할 일이 별로 없는 줄 알지만, 크나 작으나 해야 할 일은 마찬가지다. 다만 농기계 대신 몸으로 때워야 하는 것만이 다를 뿐이다. 나 역시 처음에는 과수원이 작으면 일도 쉬울 줄 알았다.

내년이면 예쁜 사과가 열릴 유목들. 솔직히 베어버리자니 아깝다. ⓒ윤용진

전에도 몇 차례 과수원을 접을까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사과가 주렁주렁 열리는 나무를 차마 베어버릴 수는 없었다. 머리로 따지면 이미 오래전에 그만두었을 일이지만, 몸에 밴 일이라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귀촌 이후 줄곧 해오던 일이었으니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어도 그냥 그러려니 하며 살았던 것 같다. 습관이 무섭다.

아내와 진지하게 우리의 앞날을 이야기했다. 과수원은 지난 16년간 충분히 경험을 했으니 앞으로는 과수원에 매여 살지는 말자고 한다. 그러고 보니 여유 있게 살자던 귀촌 초기의 약속은 어느새 아득한 기억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우리 부부의 인생에 새로운 변화를 줄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사과 과수원을 없앤다면 그동안 맛있게 먹던 복숭아와 자두나무도 덩달아 베어버려야 한다는 게 아쉽다. 몇몇 나무를 위해 비싼 농약을 따로 구입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또 그동안 중독된 새콤한 우리 집 사과 맛이 많이 그리워질 것 같다.

하지만 텃밭 농사만큼은 예전보다 더 잘 지을 수 있을 것이다. 날마다 텃밭에 신경을 쓸 테니 전문성도 높아지고 좀 더 다채로운 작물들을 재배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마도 텃밭의 규모를 조금 더 늘려도 되지 않을까 싶다.

오랜만에 사과 과수원을 하시는 형님께서 들리셨다. 반갑기도 하고, 그동안 쌓였던 하소연을 줄줄 풀어놓았다. “이제는 힘들어서 과수원을 그만 접어야겠어요!” 과수원을 쭉 둘러보신 형님이 말씀하셨다. “내년 딱 한 해만 더 해보지 그래? 새로 심은 유목들이 아깝잖아! 내년이면 사과가 열릴 텐데…” 이런 유혹 때문에 지금까지도 사과 농사를 지어왔다. “아뇨! 이제는 그만 할래요.”

단호히 거절을 했지만, 솔직히 다 자란 사과나무가 눈에 밟힌다. 내년이면 정말 예쁜 사과가 주렁주렁 열릴 텐데…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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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윤용진(농부·작가)

정리=더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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