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는 두 개의 섬이 있다. 하나는 ‘아버지 방’이라는 섬이고, 하나는 ‘내 방’이라는 섬이다. 그 섬에는 각각 한 명의 주민만이 살고 있을 뿐이고, 외부에서 들리는 소리 외에 주민들은 그 어떠한 말도 하지 않는다. 마치, 집이라는 커다란 지역에 속한 군도(群島)와 같이 말이다.
“아들, 배추 심으러 가자.”
각자의 방, 각자의 공간 안에서 침묵으로 일관했던 1년 반의 공백을 먼저 깬 사람은 아버지였다. 어스름한 여명이 깔린 새벽녘인지라 비몽사몽간에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내 어깨를 흔드는 손길은 엄연한 현실이었고, 나는 어리둥절한 상태로 아버지를 따라나섰다.
우리 가족은 5년 전, 전라도의 한 시골 마을로 귀촌했다. 시골살이를 결정한 것은 아버지이지만, 온전히 자의로 이루어진 귀촌은 아니었다. 어머니가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은 후에 맑은 공기를 마시며 건강한 농산물을 먹게 된다면 조금이나마 차도가 있을까 싶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오게 된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미 1년 반 전에 우리를 침묵의 섬에 버려두고 홀로 편안한 곳으로 가셨다. 동시에 귀촌을 하며 사들인 밭 또한 본의 아니게 황무지가 되어 버렸다.
오래도록 방치된 채 온갖 잡초들로 너저분했을 밭이 깨끗하게 개간되어 두둑에 멀칭까지 끝나 있었다. 아버지가 건네주신 배추 모종은 몇 년 만이긴 하지만 한번 접해본 적이 있는 종류였다. 항산화 물질인 베타카로틴이 풍부해 일명 ‘항암 배추’라 불리는 암탁 배추는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심었던 적이 있다. 어떻게든 어머니에게 더 좋은 것을 해주고 싶어 아버지도 나도 안간힘을 쓰던 시절이 어렴풋이 스쳐 지나갔다.
경험은 있으나 몇 년 전 일이기 때문에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모종을 들고 황망해하고 있으면 아버지는 가만히 다가와서 모종의 생장점이 흙에 묻히지 않게 너무 깊이 심으면 안 된다, 석회‧붕사‧퇴비의 비율은 이 정도가 좋다 등 차분하게 알려주셨다. 그러자 나는 아버지가 평생 교단에서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에 종사해온 분이라는 것을 상기해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부터 아버지는 황폐한 밭에 비쩍 시들어버린 농작물 같았다. 기름진 비료를 아무리 많이 주어도 자양분이 없는 땅에서 싱싱하게 자랄 소산물은 없는 법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 혼자 살아온 날보다 이미 아내와 살아온 날이 더 많았을 아버지에게 배우자의 죽음은 어떤 의미였을까. 사랑하는 이를 위해 연고도 없는 시골살이를 하면서, 그이를 위해 심었던 모든 작물이 무가치하게 쇠잔해지는 것을 바라보는 마음은 어떠했을까.
기왕 배추를 심는 것, 유기농으로 키우고 싶었다. 아버지야 원체 부지런한 분이시고 나는 복학을 준비하여 시간적 여유가 많은지라 매일 같이 배추벌레와 민달팽이를 직접 잡아내며 배추 무름병이 오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1차에서부터 3차 추비를 하는 내내 날마다 하나하나 배춧잎을 들춰가면서 벌레를 잡고, 조금이라도 발병 증세가 보이기 시작한 배추는 가차 없이 뽑아냈다. 또한, 예방을 위해 칼슘제나 칼슘액비를 수시로 엽면시비(액체 비료를 식물의 잎에 직접 공급하는 방법) 해주었다.
텃밭 가꾸기에 지나치게 몰입한 아버지와 나는 마주쳤다 하면 어떻게 건강한 김장배추를 재배할 것인가, 시비량을 언제 얼마나 늘릴 것인가, 결구를 위해 배추를 언제 묶어줄 것인가 의논했다. 어느샌가 엄마가 살아 계실 때처럼 거실에 모여서 함께 밥을 먹었고, 소파에 앉아서 TV 프로그램 <여섯시 내고향>에 나오는 유기농 배추 재배 비법을 함께 보았다.
홀아비와 철없는 아들. 상실의 외로움을 감당하지 못해 각자의 ‘섬’ 안에서 스스로 고립되기를 택했던 우리 두 사람에게 텃밭을 돌보는 일은 곧 마음을 돌보는 일이 되었다. 시들고 병들더라도 바지런한 손길로 인해 다시금 싹을 틔우는 농작물처럼 어머니와의 추억이 어린 텃밭은 아버지와 나의 ‘섬’에 하나의 가교가 되어주었다. 내년에는 노오랗게 핀 아름드리 배추꽃을 들고 어머니를 뵈러 갈 것이다. 그렇다면 올망졸망 노란 꽃잎이 노랑나비처럼 내 가슴에 날아와 어머니의 안부를 알려줄지도 모르겠다.
※ 위 작품은 아그로플러스와 농촌진흥청이 공동주최한 ‘제6회 추억의 우리 농산물 이야기 공모전’ 수상작입니다.
글 = 전대현 씨(추억의 우리 농산물 이야기 공모전 대상)
정리 = 더농부
nong-u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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