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마저 얼려버리는 한여름의 겨울왕국 : 경북 청송 얼음골 [시인 이병철의 ‘길에서 부르는 노래’ – 7]

이병철 시인은 2014년 문예지 『시인수첩』의 신인상 시 부문, 『작가세계』의 신인상 문학평론 부문에 각각 당선돼 작품 활동을 시작한 젊은 문학인입니다. 그는 시 쓰기와 문학평론 외에도 강의, 낚시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창작의 고통과 삶의 무게가 다가올 때 어디론가 훌쩍 여행을 떠납니다.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자연을 만나고, 여행지의 정서와 감동을 사진과 글로 담고 있습니다. 더농부는 그가 풀어내는 ‘길에서 부르는 노래’를 격주로 전해드립니다. 젊은 시인이 한국의 명소와 맛집을 다니며 보고 느낀 것들을 함께 즐겨보시면 좋겠습니다.


여름휴가의 첫날, 이른 아침 경부고속도로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로 진입해 충주, 문경, 영주, 안동을 차례로 지나 청송(靑松)에 든다. 청송은 말 그대로 푸른 소나무의 고장. 폭염인데도 주왕산의 깊디깊은 숲 그늘이 어디선가 소슬바람을 몰아온다. 많은 곳을 여행했지만 청송은 시골 중에 ‘찐 시골’이다. 서쪽에 진안이 있다면 동쪽엔 청송이 있다. 한적하고, 고요하며, 단순하고, 느리다. 청송은 우리나라에 몇 안 되는 ‘슬로시티’이기도 하다.

청송, 하면 어떤 사람들은 사과를 먼저 떠올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교도소를 떠올린다. 하지만 나는 청송이라는 지명에서 어금니 시린 서늘함부터 느낀다. 바로 얼음골 때문이다. 겨울이면 주왕산의 깎아지른 주상절리가 거대한 빙벽이 되는데, 거기 전 세계의 클라이머들이 달라붙어 장관을 이룬다. 여름에는 짙푸른 녹음과 투명한 물소리가 사람의 마음에 공명(公明)을 일으키는 곳이다.

청송 주왕산의 울창한 소나무숲과 얼음골 캠핑장 앞 주상절리 직벽. 인공폭포가 장관을 이룬다. ⓒ이병철

매달 끝자리가 4와 9인 날에 서는 청송 오일장에 들러 토종닭과 각종 약재, 녹두, 돼지고기, 채소 등을 사 얼음골 캠핑장으로 향한다. 아예 살림을 차릴 기세로 커다란 솥과 LPG 가스통까지 차에 실어뒀다. 잔뜩 똬리를 튼 주왕산 굽이 길이 강원도 한계령 못지않게 어질어질하다. 청송 얼음골 캠핑장은 거대한 직벽 아래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을 끼고, 빽빽한 소나무 그늘이 지붕을 이룬 너른 평지다. 주차장과 화장실, 쓰레기 분리수거장, 수도시설, 매점이 갖춰져 있다. 이용료는 따로 없어서 무료 노지 캠핑이 가능한 곳이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나는 맹렬한 더위에도 할 일은 해야 한다. 주차장에서 계곡 앞까지 리어카로 짐을 실어 나르고, 커다란 캐노피 텐트를 친다. 캐노피 텐트 안에 작은 텐트와 야전침대를 펼쳐두고, 주변을 정리한 후 취사 테이블을 꾸려 가스 화구에 불을 놓는다. 큰솥에서 물이 펄펄 끓을 때 토종닭과 약재를 넣고 백숙을 삶기 시작한다. 한 시간쯤 푹 끓여야 다 익을 것이다. 닭이 익을 동안 계곡에 몸을 담근다. 더위가 싹 가신다. 계곡물에 의자를 놓고 앉아 캔맥주를 마신다. 얼음골이라는 이름답게 물에 담근 종아리가 얼얼할 지경이다.

캠핑을 준비하다보니 거의 집 한 채를 옮겨온 수준이다. ⓒ이병철

앉아 있으니 심심해져 천렵을 해보기로 한다. 된장과 밥풀을 한주먹 뭉쳐 넣은 어항을 물 깊은 자리에 놓는다. 어항에 고기가 들어오길 기다리면서, 사람들이 놀지 않는 하류로 내려가 루어 낚시를 던지자 앙증맞은 꺽지가 달려든다. 씨알 굵은 녀석들이라면 매운탕을 끓이겠지만, 너무 작아 방생한다. 한두 시간 후에 어항을 걷으니 꽤 큼지막한 돌고기 한 마리가 들었지만, 다시 물로 돌려보낸다.

한여름에도 얼음이 어는 얼음골의 신비는 그 전모가 아직 다 밝혀지지 않았다. 기온이 높을수록 더 큰 얼음이 생기는 골짜기 안에 약수터가 있다. 입구에 서자마자 냉동 창고에 들어선 것 같은 서늘함에 깜짝 놀란다. 바위틈에서 나오는 약수를 한 사발 마시자 속이 짜릿하다. 그야말로 얼음물이라, 벌컥벌컥 들이켜다가도 한 호흡 멈출 수밖에 없다. 에어컨, 선풍기, 냉장고 없이 더위를 피할 수 있다니, 자연은 언제나 인간보다 현명하다.

얼음골의 풍경들(왼쪽 위 시계방향으로). 황기 가시오가피 엄나무 등을 넣고 토종닭백숙을 끓였다. 동심으로 돌아가 어항 놓기에도 도전했다. 작고 앙증맞은 얼음골 꺽지는 방생해줬다. 청송 얼음골 약수터는 여름에도 얼음이 언다. ⓒ이병철

어느새 백숙이 완성됐다. 캠핑장 입구 ‘수부정 식당’에서 사 온 얼음 동동주를 왈칵 따르고, 큼지막한 닭다리를 뜯으니 신선이 부럽지 않다. 절벽에서 쏟아지는 인공폭포 물소리를 들으며 닭고기를 발라 먹고, 녹두와 찹쌀을 넣은 죽까지 알뜰하게 먹고 나자 노곤한 졸음이 밀려온다. 야전침대에 누워 매미 노랫소리를 베개 삼아 낮잠에 든다. 잠에서 깨니 또 출출하다. 사위가 어둑해질 무렵, 솥뚜껑에 돼지고기를 굽는다. 놀고, 먹고, 자고, 먹고, 마시고…. 천국은 멀리 있지 않다. 머리 위로 별빛이 내린다.

토종닭백숙을 뜯으니 마치 산적이 된 기분이다. 삼복더위도 끄떡없다. 수부정 식당에서 산 얼음 동동주를 반주 삼아 녹두찹쌀죽까지 알차게 해 먹었다. ⓒ이병철

다음날, 새벽녘에 깨어나 커피를 내린다. “장막을 걷어라. 나의 좁은 눈으로 이 세상을 떠 보자. 창문을 열어라. 춤추는 산들바람을 한 번 또 느껴보자.” 한대수의 노래가 입에서 절로 논다. 지금 여기, 이 시간이야말로 ‘행복의 나라’가 아닌가?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 온갖 새들의 소리, 친구들 코 고는 소리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음악을 언제 또 들을 수 있을까? 소중한 것들은 다 찰나 안에만 있다. 코골이가 잠시 멎더니 매미가 그 찰나를 이어 받는다. 해가 뜨면 여름이 온몸으로 수런거릴 것이다.

친구들 잠을 깨우지 않으려고 작은 동작으로, 집에서 챙겨온 제주 한치를 손질하고, 전날 먹다 남은 삼겹살을 작게 자르고, 청양고추와 양파, 대파를 썬다. 해장과 식사를 동시에 해결할 캠핑 요리로 짜장라면만한 게 또 없다.

눈 비비며 하품을 하는 친구들에게 커피 한 잔씩 돌리고, 라면을 끓인다. 꿈속에도 맑은 물이 흘렀는지 전날 진탕 퍼마셨지만 다들 쌩쌩해 보인다. 캠핑장에서 먹는 라면만큼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도 없다. 돼지고기와 한치가 듬뿍 들어간 짜장라면 다섯 개가 게눈 감추듯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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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 얼음골

동틀 무렵, 얼음골을 가득 채우는 새소리 ⓒ이병철

지상 최고의 짜장라면을 위해 먼저 제주도 한치와 돼지고기를 솥뚜껑에 볶아낸다. 한치삼겹살짜장라면으로 다섯 봉지가 그야말로 순삭됐다. ⓒ이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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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치삼겹살 짜장라면

맛있는 소리. 소리에서 냄새가 난다. 이게 바로 공감각적 심상이다. ⓒ이병철

소나무 그늘이 햇빛을 넉넉히 막아주는 오전, 태양이 맹렬하게 타오르기 전 텐트를 걷는다. 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리지만 걷는 건 금방이다. 셋이서 손을 합하니 수월하다. 수돗가에 가 설거지를 하고, 리어카로 짐 옮겨 차에 싣고, 분리수거장에 쓰레기 버리고, 캠핑했던 자리를 다시금 살펴 정리한다. 캠핑이란 모름지기 다녀가지 않은 것처럼, 자연에 흔적을 남기지 않아야 한다.

텐트를 걷는 동안 땀을 많이 흘려 찝찝하다. 차에 타 에어컨 바람을 아무리 쐬어도 얼음골 계곡에서의 서늘함 같지 않다. 여름휴가의 둘째 날, 청송을 떠나 이제 어디로 갈까?

하룻밤 야영으로 꼬질꼬질해진 상거지들은 울진으로 향한다. 거기 우리나라 유일의 자연 용출 온천인 덕구온천이 있기 때문이다. 때 빼고 광내고 노천온천에서 망중한을 즐기리라. 리조트 객실에서 에어컨 빵빵하게 틀어두고 낮잠도 자야겠다. 저녁엔 죽변항에 가 대게를 먹어야지. 체크인 시간까지는 꽤 남았다. 영덕에 들렀다가 ‘대진 지나 명사 이십리의 풍경이 관광엽서처럼 펼쳐’진 ‘울진을 지나 양정, 봉평해수욕장을 지난 다음 죽변’(윤대녕, <신라의 푸른 길>)에 가야겠다.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 이야기는 영덕, 울진이다. 기대하시라.

청송 얼음골을 떠나며, 아쉬움에 자꾸만 돌아보게 만드는 절경. ⓒ이병철

※ 청송 얼음골 캠핑장 이용 tip

*낙석 위험으로 계곡 일부 구간은 진입이 제한된다. 관리자의 통제를 잘 따라야 한다.

*매점을 겸하는 ‘수부정 식당’에서 종량제 봉투를 판다. 분리수거는 캠핑의 기본이다.

*주차장에서 캠핑장까지 짐을 실어 나르는 리어카는 공용이므로 사용 후 제자리에 두자.

*매점이 일찍 문을 닫는다. 가장 가까운 편의점은 대략 20km 떨어져 있다. 캠핑장에 오기 전, 읍내에서 미리 장을 봐 오는 게 좋다.


글·사진=이병철(시인·문학평론가)

정리=더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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