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게으르고 손은 부지런하단다 – 고혜진 [제6회 추억의 우리 농산물 이야기 공모전 장려상]

“고딸 얼른 일어나라. 할머니들 벌써 밭에 올라가셨다.”

3년 전, 나는 고향 섬으로 돌아왔다. 곧 마흔을 바라보는 딸래미가 결혼도 하지 않고, 빈털터리가 돼 고향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사실 그때 내가 비빌 언덕이라고는 고향, 섬 그리고 아버지의 품이 전부였다.

“네. 일어났어요.” 아직도 적응되지 않는 시골 아침이다.

오늘 할 일은 돌아가신 조부모 산소 밭에 심어 놓은 조생종 양파를 수확하는 것이다.

외가가 양파로 유명한 무안의 영향이었을까? 아버지는 해마다 쉬지 않고 양파 농사를 했다. 간혹 양팟값이 폭삭 망해 밭을 그대로 갈아 없애 버릴 때도 있었지만, 이상하게 아버지는 양파만은 손에서 놓지 않으셨다. 그 덕에 양파는 돈 내고 사 먹어 본 적이 없다.

양파밭은 우리 동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산 아래 언덕에 있다. 가난한 농사꾼 아들로 태어나 젊은 시절 잠시 뭍에 나가 막노동을 해 번 돈을 모아 장만한 밭이다. 그런 경치 좋은 밭의 가장자리에 조부모를 모셨다는 것이 기쁘셨는지 이따금 막걸리 한 잔에 조부모를 향한 그리움을 삼키시곤 했다.

“안녕하세요.” 동이 트자마자 시작한 모양이다. 밭을 보니 이미 양파밭 반이 정리돼 있었다.

“아침 커피 드셨어요?” 집에 나오면서 달달구리하게 커피믹스를 타왔다. 의외로 할머니들에게 인기 만점이다. 단 오후 3시 이후에는 금지. 잠이 오지 않기 때문이다.

“와, 벌써 이렇게 캐셨네요.”

옆에서 양파를 자르던 아버지가 다가와 한마디 건넨다. “눈은 게으르고 손은 부지런하단다.” 수 없이 들은 말. 어제도 듣고 오늘도 듣고 아마 내일도 듣겠지.

“아버지 거는 따로 있어.” 눈치를 채셨는지 어린아이처럼 웃음꽃이 핀 얼굴로 장갑을 벗는다. 흙먼지 날리며 장갑을 벗자, 주름 가득 상처투성이인 손이 보였다. 따로 챙겨온 막걸릿잔을 꺼내 아버지 손바닥에 올려놓는다. 시원한 바람이 분다.

갓 자른 생양파 냄새, 썩어 버린 양파 냄새, 시큼한 막걸리 냄새, 그리고 아버지의 구슬땀 냄새. 오묘한 향이 났다.

“아따 맛 좋다.” 안주로 챙겨 간 양파김치를 한 조각 입에 넣고 오물오물하며 다시 제자리로 가신다.

오늘 내가 할 임무는 양파 캐기와 양파망 피라미드 쌓기다. 양파 자르는 일이나, 크기별로 구분해서 망에 넣기는 아직도 어렵다. 내 눈에는 다 커 보이기 때문이다. 과연 몇 년을 해야 눈감고도 담을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될지.

아버지 옆으로 가 양파를 캔다. 가뭄이 심했는데도 양파 씨알이 굵다. 올해는 양팟값이 좋아야 할 텐데 큰 양파를 보니 기분이 좋다. 무릎을 꿇고 ‘양파님 어서 나와주세요’ 하는 심정으로 조심스레 캐 나간다. 제법 손에 익숙해져서 양손으로 뽑는다. 양파 뽑기 달인 대회라도 나가볼까 하며 우쭐해 있는데 나보다 뒤에 온 할머니가 벌써 내 옆을 앞질러 간다.

“할머니 진짜 빠르시네요.”라고 했더니 “그럼 내가 올해 벌써 9학년인디 80년은 이 일만 했당께.”하며 웃으셨다. 멋쩍어서 양파밭을 훑어보며 “아직도 많이 남았네요. 오늘 다 끝낼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옆에서 아버지가 듣고는 또 한 번 이야기 한다. ‘눈은 게으르고 손은 부지런하단다’라고.

시골에서 태어난 것도 싫었지만, 부모님이 농부인 것도 싫었다. 철없던 사춘기 시절 괜히 아버지를 원망했었다. 성인이 되자마자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향을 떠났다. 15여 년 인천과 서울에서도 살아보고 일본에서도 나름 오래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사십춘기가 찾아온 것이었다. 아마 그것은 향수병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제일 먼저 고향이 떠올랐다. 그리운 고향의 향기.

내가 고향에 돌아온 건 한창 바쁜 농번기였다. 다시 돌아온 고향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어느새 연도교가 생겨 더 배를 타지 않아도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곳이 됐다. 목포로 마중 나온 아버지의 차를 타고 고향 집으로 왔다. 아버지는 목이 타셨는지 부엌으로 들어가 시원하게 막걸리 한 잔을 들이켰다.

“고생했다 좀 쉬어라.” 작은방으로 들어가 일바지로 갈아입고 문턱에 앉아 장화로 갈아 신는다.

“밭에 가시게요?”

“양파밭에 물도 주고 지심도 메러 가야제.”

“금방 어두워질 텐데 언제 다하려고요?”라고 되물었다.

“눈은 게으르고 손은 부지런하단다.”

터벅터벅 밭으로 나가시는 아버지 뒷모습을 바라본다. 아버지가 머문 자리 그리운 향이 났다.

양파밭에서 바라본 동네 위로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수고하셨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던 양파를 모두 망에 담아 피라미드를 만들었다. 버려지는 쭉정이가 아까워 차두에 담아 하나씩 머리에 이고 사라지는 할머니들.

햇빛에 뜨듯해진 막걸릿병을 꺼내 아버지에게 건넨다.

“아따 시원하다.”

“그럴 리가요?”

시원한 바람이 분다. 어느새 나에게도 아버지의 향기가 났다.


※ 위 작품은 아그로플러스와 농촌진흥청이 공동주최한 ‘제6회 추억의 우리 농산물 이야기 공모전’ 수상작입니다.

글 = 고혜진 씨 (추억의 우리 농산물 이야기 공모전 장려상)

정리 = 더농부

nong-u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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