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산 깊은 골 : 강원 양구 [시인 이병철의 ‘길에서 부르는 노래’ – 4]

이병철 시인은 2014년 문예지 『시인수첩』의 신인상 시 부문, 『작가세계』의 신인상 문학평론 부문에 각각 당선돼 작품 활동을 시작한 젊은 문학인입니다. 그는 시 쓰기와 문학평론 외에도 강의, 낚시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창작의 고통과 삶의 무게가 다가올 때 어디론가 훌쩍 여행을 떠납니다.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자연을 만나고, 여행지의 정서와 감동을 사진과 글로 담고 있습니다. 더농부는 그가 풀어내는 ‘길에서 부르는 노래’를 격주로 전해드립니다. 젊은 시인이 한국의 명소와 맛집을 다니며 보고 느낀 것들을 함께 즐겨보시면 좋겠습니다.


강원 양구 해안분지 전경 ⓒ뉴시스

양구 상무룡리에서 줄배를 타고 파서탕으로 들어간 유년의 여름, 계곡 바위에 매어놓은 흑염소를 아버지와 방갈로 주인 영감님이 그 자리에서 잡는 걸 보고 어린 마음에 엄청 울었던 기억이 난다. 까만 털 속에서 더 까맣게, 그러나 한없이 반짝이던 선한 눈망울 때문이었다. 해체 작업이 끝나고, 어른들은 주먹돌로 만든 화로에 장작불을 댕겨 석쇠를 얹었다. 그 위에서 흑염소 고기가 노릇노릇 익어 가는데, 아, 그 고소한 냄새! 울음도 뚝 그치고 어느새 불가에 앉아 배 터지도록 고기를 입에 넣었다.

어린 시절, 양구에서의 완전한 행복. 낚시를 왜 좋아하느냐고 누가 물으면 그냥 이 사진을 보여준다. ⓒ이병철

줄배를 띄워주고 염소를 잡아준 영감님이 껄껄 웃으며 내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분이 집중호우에 의한 산사태로 돌아가셨다는 걸 이듬해 수해 관련 뉴스 자막의 사망자 명단을 통해 알게 되었다. 나의 여름은 그 유년의 기억들이 울창한 잎사귀를 뻗어 추억이라는 깊은 그늘을 드리우기도 하고, 뙤약볕 같은 세상살이를 막아주기도 하는, 그런 계절이다.

공병소대장은 말이 간부지 거의 공사판 작업반장이나 마찬가지였다. 페인트와 실리콘, 각종 오일로 얼룩진 전투복은 누가 봐도 작업복이었다. ⓒ이병철

우리나라 군필자 남성 대부분은 ’높은 산 깊은 골 적막한 산하’에서 군 생활을 했을 것이다. 향토사단이나 수도권 부대, 몇몇 특수 병과를 제외하곤 상당수가 전방에서, 또는 전방을 방불케 하는 ‘빡센’ 부대에서 ‘짬밥’을 먹었으리라. 나 역시 강원도 양구 21사단 백두산부대에서 공병 장교로 3년을 근무했다. 금강산 가칠봉, 도솔산, 백석산, 펀치볼 등을 매일 같이 오르내리며 레미콘, 타일, 방호벽, 페인트, 용접 작업 등을 했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다”던 인제·원통 장병들이 양구 장병들을 보며 위안 삼았다고 한다. GOP 소초에는 5월에도 눈이 내리고, 7월에도 밤에는 두터운 야상 외투를 입어야할 정도로 혹독한 곳이다. 군용 트럭을 타고 대암산 울창한 산림을 지날 때마다 한반도엔 호랑이가 분명히 생존해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군 복무는 고됐지만 세상 어디에도 없을 풍경들을 볼 수 있어 행복했던 시절이다. 하루 종일 뙤약볕 아래서 레미콘을 부리다가 밤이 되면 전방의 적막한 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글썽거렸다. 겨울엔 하얀 구름이 바다를 이뤄 높은 산봉우리들이 절해고도의 외딴 섬처럼 아름다웠다.

격오지 중의 격오지였던 양구가 이젠 가족과 함께 즐길 수 있는 테마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다. 서울 춘천간 고속도로를 이용해서, 몇 해 전 개통한 배후령 터널을 지나면 2시간 만에 서울에서 양구에 닿을 수 있다. 예전에는 소양호에서 배를 타야만 들어갈 수 있었던 육지 속의 섬이었는데, 그 시절을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격세지감일 것이다.

초여름 양구로 가는 길, 구불구불한 굽잇길을 오르내리니 강원도가 실감났다. 배후령 터널을 넘지 않고 인제를 경유해 양구에 진입했다. 해발고도 600미터 도로에서 나뭇가지 사이로 얼핏 소양호가 웅장한 위엄을 드러낼 때마다 가슴이 뻥 뚫리는 듯했다.

남면 가오작리에 있는 광치막국수. ⓒ이병철

양구에 올 때면 항상 남면 가오작리에 위치한 ‘광치막국수’에 들른다. 시원한 막국수도 끝내주지만, 이 집의 압권은 편육이다. 부드럽고 달고 담백하게 고기를 삶는다. 가격도 착하다. 야들야들한 편육 한 점을 막국수에 싸서 ‘육쌈 막국수’로 즐기면 좋다. 감자전과 도토리묵도 빼놓을 수 없는 별미다. 이 집에서 직접 담그는 동동주 또한 권할 만하다.

야들야들한 돼지수육에 동동주 한 사발. ⓒ이병철

점심을 먹고 평화의 댐으로 향했다. 화천과 양구 경계에 위치한 평화의 댐은 정말 어마어마하게 커서, 그 넓이와 높이에 압도된다. 댐의 장관을 한참 구경하다가 분쟁을 겪은 세계 60여개국의 탄피 40톤을 모아 녹여 만든 세계 평화의 종도 때려보았다. 세계 평화에 기여한 위인들의 패널 사이에 故김대중 전 대통령도 있다.

평화의댐. 물이 많이 빠져 있다. ⓒ이병철

양구군 방산면 오미리 수입천변에 위치한 <산골나그네> 펜션에 짐을 풀었다. 근방에 여러 펜션과 민박이 있지만, 이 집이 저렴한 숙박비용에 시설도 좋다. 선크림을 바르고는 ‘더위를 깨트리는’ 파서탕(破暑湯)으로 향했다. 유년 시절, 아버지와 함께 피서를 와 천렵하던 추억의 장소를 20여년 만에 다시 찾은 것이다.

방산면 오미리를 지나 파서탕으로 가는 길. 수입천의 기암괴석들. ⓒ이병철

파서탕교 주차장에서부터 비포장도로를 달려 파서탕 진입로에 자리한 퇴역군인의 별장 앞까지 접근했으나 철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진입로만 사유지이고 파서탕은 모든 국민이 함께 누릴 수 있는 공간인데, 야속했다. 결국 파서탕 조금 못 미친 수입천 계곡에서 물놀이를 즐겼다.

금강산 두타연에서부터 흘러내려온 시퍼런 물이 기암괴석들 사이로 굽이치는 이곳은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텐트와 타프를 치거나, 앉아서 쉴만한 바위, 자갈밭, 모래바닥, 소나무 숲이 있으므로 가족 피서 여행지로 손색없다.

별빛 파마크(물고기 특유의 무늬)가 진한 수입천 꺽지. ⓒ이병철

대물 꺽지가 지키고 있을 것만 같은 큰 바위들 사이로 웜과 스피너를 던져봤지만 입질을 받을 수 없었다. 산골나그네 펜션 아래 남전교 다리 밑에서 두어 시간 더 낚시를 했다. 꺽지 몇 마리가 반갑게 모습을 보였다. 전방은 꺽지들마저 전투복을 입고 있다. 무늬와 채색이 정말 진하다. 강원도 특유의 ‘은하수 꺽지’를 바라보고 있으니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이 꺽지 무늬 속에 다 쏟아져 있는 듯했다.

어두워질 무렵 양구 국토정중앙 천문대를 찾았다. 이곳 천문대에서는 해설사로부터 별자리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망원경으로 달과 별을 관측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날 저녁엔 구름이 끼어 별을 관측할 수 없었다. 영상관에서 별자리 관련 영상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날씨가 도와주지 않았지만, 어쨌든 양구 천문대는 꼭 한번 가볼만 한 곳이다. 소중한 이와 함께 별을 보며 추억을 만들 수 있다.

양구읍 하리 ‘처음처럼’의 매운등갈비. ⓒ이병철

양구읍 하리에 있는 ‘처음처럼’은 군 복무 시절 가장 사랑한 식당이다. 이 집 매운등갈비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게 맵다. 매운 단계를 조절해 주문할 수 있는데, 중간(보통)으로 해도 엄청 맵다. 그런데, 맛있다. 따로 익혀 부드러운 돼지 등갈비를 잘게 썬 양파와 대파, 고추가 가득 들어간 시뻘건 양념 국물과 함께 끓여 먹는데, 소주 서너 병은 금방이다. 고기를 다 먹고 남은 국물에 라면사리를 넣거나 밥을 볶아 먹어도 환상적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집인데, 양구를 찾는다면 꼭 한번 들려볼 만하다.

풀벌레 소리를 베개 삼아 맑게 자고, 아침 식사 겸 속풀이로 산채비빔밥을 택했다. 동면 팔랑리에 있는 ’풍미식당’ 고기 짬뽕과 고민하다 강원도 자연의 맛을 만끽하는 편이 더 좋을 것 같아 청리에 위치한 ‘청수골 쉼터’로 향했다. 짬뽕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풍미식당’은 한번쯤 가볼만 한 곳이다.

양구읍 청리 ‘청수골 쉼터’의 산채비빔밥. ⓒ이병철

‘청수골 쉼터’는 원래 송현리 도고터널 근처에 있었는데, 몇 해 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이 집 산채비빔밥은 양구의 곰취, 시래기, 버섯, 고사리 등 10가지가 넘는 산나물을 고추장, 참기름과 함께 비벼 먹는다. 먹으면서 몸이 건강해지는 느낌이다. 황태 육수로 끓인 콩나물국이 같이 나오는데, 해장에 그만이다. 따뜻한 숭늉과 식혜까지 먹고 나오면 식당 이름처럼 정말 쉼을 얻는 기분이 든다.

양구읍 정리 ‘박수근 미술관’ 외부의 목판화. ⓒ이병철

양구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 박수근의 고향이기도 하다. 정림리 박수근미술관에는 가족과 이웃,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따뜻한 색채로 캔버스에 담아낸 박수근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가난과 병, 온갖 불행 가운데서도 ‘인간의 마음’을 놓지 않았던 박수근의 그림을 볼 때면, 한 예술가의 위대한 영혼 앞에 숙연해진다. 그는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는데, 아마 진작 도착했을 것이다.

미술관에서 나와 남면 후곡리 후곡약수터를 찾았다. 100여 년 전에 이 근방에서 소를 치던 농부가 발견했다는 신비의 약수다. 소가 배탈이 나 설사를 하는데, 들판에서 솟는 이 물을 마시더니 설사가 멈추는 것을 보고 약효를 알게 된 것이다. 철분, 불소 등 미네랄이 함유되어 있어 쇳물 내지는 핏물 같은 냄새와 맛이 난다. 탄산도 느껴진다. 비위가 약한 사람은 두 모금 이상 마시기 힘들 것이다. 몸에 좋은 약은 삼키기 힘든 법, 위장병에 특효약이며 피부병에도 좋다고 하니 몇 모금 마셔보는 것도 좋겠다. 이 물로 밥을 지으면 밥이 파랗게 되는 신기한 현상도 볼 수 있다.

후곡리 ‘후곡약수터’ ⓒ이병철

마지막 일정은 을지전망대와 제4땅굴 견학이었다. 해발 1000m 위에 만들어진 을지전망대는 북한군 GP와 금강산까지 전망할 수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안보관광지다. 제4땅굴은 1990년에 발견된 것으로, 갱도열차를 타고 남방한계선까지 진입해 관람할 수 있다. 두 곳은 해안면 양구 통일관에서 출입 신청서를 작성해야만 가볼 수 있다. 양구는 한국전쟁 최대의 격전지로 ‘피의 능선’, ‘단장의 능선’ 처절한 전투로도 잘 알려져 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역시 이곳 양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제4땅굴 입구. 남북분단의 아픈 상흔이다. ⓒ이병철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해안면에서 인제를 경유해 서울로 가는 편이 좋아 인제 쪽으로 차를 몰았다. 날씨가 좋으면 인제를 거쳐 미시령 옛길을 올라 지금은 폐쇄된, 추억의 미시령 휴게소 앞에서 설악산의 아름다운 모습도 한껏 눈에 담아볼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내린천과 소양강, 홍천강, 북한강이 차례로 보이는 길을 따라 서울에 도착했다.

여름, 이라고 발음하면 몸이 설레고 마음이 가벼워진다. 울창한 숲의 물푸레나무 한 그루가 몸속에서 자라나는 느낌이다. 유년의 여름방학이면 아버지 손에 이끌려 수많은 강물과 노을, 물고기들, 그리고 별을 만났다. 비수구미, 피아시, 파서탕, 구만리, 서마니, 어성전, 부론리… 내 영혼에 음각무늬로 새겨진 그 아름다운 이름들! 나에게 여름은 모든 것이 완전했던 유년의 행복을 재현하는 계절이자 금빛 강물처럼 맑게 빛나던 순수한 마음을 회복하는 치유의 시간이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 여름이 가득하면 좋겠다.


글·사진=이병철(시인·문학평론가)

정리=더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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