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멋대로 여수 11미 : 전남 여수 [시인 이병철의 ‘길에서 부르는 노래’ – 5]

이병철 시인은 2014년 문예지 『시인수첩』의 신인상 시 부문, 『작가세계』의 신인상 문학평론 부문에 각각 당선돼 작품 활동을 시작한 젊은 문학인입니다. 그는 시 쓰기와 문학평론 외에도 강의, 낚시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창작의 고통과 삶의 무게가 다가올 때 어디론가 훌쩍 여행을 떠납니다.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자연을 만나고, 여행지의 정서와 감동을 사진과 글로 담고 있습니다. 더농부는 그가 풀어내는 ‘길에서 부르는 노래’를 격주로 전해드립니다. 젊은 시인이 한국의 명소와 맛집을 다니며 보고 느낀 것들을 함께 즐겨보시면 좋겠습니다.


나의 첫 바다 여수 ⓒ이병철

여수는 내 첫 바다다. 전남 완도가 고향인 어머니 등에 업혀 다섯 살 때 처음 본 바다는 끝없이 넘실대는 푸른빛이었다. 시야를 가득 채운 푸른빛은 아름다움인 동시에 두려움이었다. 때로 너무 아름다운 것은 이유 모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일까. 처음 본 바다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때, 유년의 나를 압도한 거대한 푸른 물결이 여수 바다의 절경이었다는 것을 커서야 알았다. 그리고 그 푸른빛은 내 문학의 원형, 내 무의식에 새겨진 모든 아름다움의 시작이 되었다. 내 시에 유독 푸른 색채와 이미지, 바다가 많이 등장하는 것도 다 여수 바다가 내 안에 넘실거리는 까닭이다.

동백과 벚꽃 피는 봄이 좋고, 선선한 바람 부는 가을이 좋고, 포구에 싸락싸락 눈 내리는 겨울이 좋지만 여수는 역시 여름의 미항(美港)이다. 뜨겁게 쏟아지는 태양이 수평선 위에 금빛 윤슬을 잔뜩 엎질러놓을 때, 한낮의 열기를 은은히 머금은 석양이 바다의 파랑과 입을 맞출 때, 별들이 글썽거리며 바다로 자맥질할 때, 여수 바다는 아름답다. 그리고 맛있다.

이번 글은 철저히 식도락에만 집중하고자 한다. 본격적인 식도락 이야기에 앞서, 그래도 가볼 만한 몇 군데를 그야말로 호명만 하는 수준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시간이 없다. 입에 침이 고인다. 오동도와 향일암, 은적사는 꼭 가보길 바란다. 어느 시인은 향일암에 가면 “세상의 그 어떤 해일에도 더럽혀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절벽의 힘으로 몸에 붉은 기운을 밀어 넣는 것들이 있다”고 노래했는데, 그가 바로 여수 섬달천 출신의 내 친구 황종권 시인이다.

구봉산에서 내려다 본 미항 여수 ⓒ이병철

이른 아침, 향일암에 가 해돋이를 보고, 오동도 푸른 바다를 실컷 눈에 담는다. 오전에는 바다 위 산책로인 소호동동다리를 걷거나 해발 388m 구봉산에 올라 여수 전체를 내려다보는 것도 좋다. 낮에는 엑스포공원과 히든베이호텔을 구경하며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마시거나 방죽포 해수욕장에서 물놀이를 하면서 더위를 잊어본다. 일몰 무렵 케이블카를 타고 여수 바다의 황홀한 석양을 감상하면 먼 이국에 와 있는 듯한 ‘지중해 마음’이 된다.

여름밤을 찬란하게 밝히는 돌산대교 야경을 보면서, 버스커버스커의 ‘여수 밤바다’를 흥얼거리며 종포 해양공원을 거닐면 볼 거 다 보고, 할 거 다 한 여수 여행의 하루가 저문다. 하루 더 여수에 머문다면 이튿날에는 ‘황금자라섬’ 금오도에 가 비렁길을 걷거나 개도에 가 그 유명한 개도 막걸리를 마셔보는 걸 추천한다.

한려수도 황금어장을 지닌 여수는 미식의 고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여러 음식들이 있지만 특히 여수 십미(十味)라 하는 10가지 진미가 여행객들을 매혹시킨다. 여수관광문화 홈페이지에서는 돌산갓김치, 게장백반, 서대회, 여수 한정식, 갯장어회와 샤브샤브, 굴구이, 장어구이와 탕, 갈치조림, 새조개 샤브샤브, 전어회와 구이를 여수 10미로 정해뒀다.

그런데 나는 여름에 한하여 그걸 좀 편집해 볼까 한다. 여름에 맛보기 힘든 굴 빼고, 새조개 빼고, 어느 지역에나 있는 한정식 빼고, 목포와 제주에서도 많이 먹는 갈치 빼고, 여수 말로 금풍생이, 즉 군평선이보다 맛이 떨어지는 전어도 빼기로 한다.

돌산대교를 건널 때면 늘 미식의 기쁨으로 설렌다. ⓒ이병철

막상 빼려니 아쉬우니 간략하게만 언급하자면, 굴은 찬바람 불 때 돌산 안굴전마을에 가 먹는 게 최고다. 새조개는 봄이면 여수의 이름난 갯장어 식당들 어딜 가나 맛볼 수 있다. 한정식 대신 환상적인 오션뷰를 즐기며 삼겹살과 갑오징어회, 멍게, 해삼, 전복 등을 함께 즐길 수 있는 ‘동백산장’을 추천한다. 갈치조림은 돌산도에 있는 ‘갈치야’가 잘하고, 전어회와 구이는 봉선동 ‘광진맛집’, 금풍생이 구이는 학동 ‘동네방네’가 맛있다.

자, 내 멋대로 고른 ‘여름 한정 여수 대표 11미’(축구를 11명이 하는 것처럼, 여수 대표도 11미다)는 다음과 같다. 기존의 서대회, 돌게장, 갓김치, 하모 샤브샤브, 통장어탕에 더해 닭구이, 국밥, 삼합, 선어회, 흑염소 수육, 그리고 수제버거까지다.

삼학집 서대회무침 ⓒ이병철

먼저 서대회는 두 말할 것 없이 종화동 ‘삼학집’이다. 1947년부터 장사를 한 75년 노포, 서대회무침을 팔아 빌딩을 세웠다는 전설의 집이다. 여수에는 서대회무침을 파는 식당이 많은데, 삼학집은 1인분을 주문할 수 있어 ‘고독한 미식가’들에게 인기가 많다.

일반 초장이 아닌 막걸리식초를 넣은 양념장으로 무쳐내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은은한 신맛이 침샘을 터뜨린다. 그냥 먹어도 맛있고, 마늘 고추와 함께 쌈에 싸 먹어도 맛있지만 압권은 역시 스테인리스 대접에 따끈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흰 쌀밥을 넣고 서대회무침 한움큼 얹은 뒤 김가루 뿌리고 참기름 둘러 비벼 먹는 비빔밥이다.

싱싱게장마을 게장 백반. 밥도둑으로 치자면 ‘대도’ 조세형도 울고 간다. ⓒ이병철

돌게장백반은 문수동 ‘싱싱게장마을’이 끝내준다. 1만2천원짜리 게장백반을 시키면 수북이 쌓인 간장게장과 양념게장, 돌게탕, 조기조림, 갓김치, 각종 밑반찬들이 상에 오른다.

괜히 밥도둑이 아니다. 일반 공기가 아닌 넓적한 그릇에 고봉밥이 담겨 나오는데, 간장게장에 한 숟갈, 양념게장에 한 숟갈 뜨다가 밥이 반쯤 남으면 행복한 고민에 빠진다. 이걸 간장게장 게딱지에 비벼먹을까, 양념게장 게살을 짜내 매콤한 양념과 함께 비벼 먹을까… 고민하다 결국 밥 한 그릇을 더 시킨다. 밥은 얼마든지 리필이 가능하다.

여수 10미로 꼽히는 돌산갓김치 ⓒ이병철

배가 터질 것 같지만 견뎌야 한다. 아직 9미가 더 남았기 때문이다. 소화제를 먹든가 화장실을 가든가 구봉산을 오르내리든가 어떻게든 소화를 시켜야 한다.

돌산갓김치는 여수의 어느 식당에 가도 기본 반찬으로 다 나온다. 그래서 특별히 소개하지 않아도 된다. 현지에서 갓김치를 구입한 후 집에 와 삼겹살이나 라면에 곁들여 먹어도 좋고, 소면을 삶아 찬물에 씻은 뒤 갓김치를 넣고 들기름 둘러 비빔국수를 해 먹어도 맛있다. 여수 화장동의 ‘고량진미’는 돌산갓김치와 돼지고기를 푹 끓여 낸 갓김치찜을 파는데, 먹을 만하다.

여름 보양식 당머리첫집 갯장어 샤브샤브. 살짝 익히면 갯장어 살이 꽃을 피운다. 갯장어회는 포슬포슬하며 찰지고 고소하다. ⓒ이병철

내가 여름 여수에 가는 이유는 하모, 즉 갯장어 샤브샤브를 먹기 위함이다. 이곳 사람들은 ‘참장어’라고 부른다.

남산동 참장어거리에는 갯장어 식당이 즐비한데, 가장 유명한 집이 ‘당머리첫집’이다. 가격이 만만찮지만 비싼 만큼 황홀한 맛을 뽐낸다. 갯장어 샤부샤부와 회를 주문하면 온갖 곁들임 음식과 함께 상다리가 부러질 만큼 풍요로운 한 상이 차려진다. 정교한 솜씨로 칼집을 내 손질한 갯장어를 끓는 육수에 넣고, 일본식 이름인 ‘하모 유비끼’를 천천히 소리 내어 발음하는 5초 동안 갯장어 살점이 하얀 꽃을 피운다. 그걸 간장 베이스의 특제 양념소스에 찍어 먹으면 입에서 그냥 녹는다. 더 맛있게 즐기려면 생양파에 익힌 갯장어를 얹고, 된장 찍은 마늘 고추와 함께 먹는다. 낮술을 술술 부른다. 요즘 표현으로 ‘소주 10병각‘이다.

상아식당 통장어탕 ⓒ이병철

통장어탕은 국동 어항단지로의 ‘상아식당’과 ‘자매식당’이 양대산맥이다. 통장어탕에 들어가는 장어는 흔히 ‘아나고’라 부르는 붕장어다. 나는 주로 상아식당을 선호한다.

구수한 된장국물에 통으로 토막 낸 붕장어와 우거지가 듬뿍 들어간 장어탕은 보양식이지만 해장국으로도 제격이다. 붕장어에서 배어 나온 기름이 국물에 걸쳐져 한 숟갈 떠먹으면 추어탕 같기도 하고 곰국 같기도 한 것이 속을 뜨끈하니 데워 편안하게 해준다. 장어탕에 밥을 말아 한 숟갈 크게 뜬 다음 멍게젓갈을 얹어 먹으면 입안에서 축제가 열린다.

구봉산 기슭 약수산장 닭구이 ⓒ이병철

닭구이는 단연 구봉산 초입 국동 ‘약수산장’이다. 쾌청한 숲 그늘 아래 지지배배 새소리 들으며 토종닭 숯불구이를 먹을 수 있는 집이다. 숯불구이 한 마리를 시키면 싱싱한 닭 육회가 먼저 나오고, 부위별로 손질된 구이용 닭이 석쇠에 오른다. 다 먹고 나면 녹두죽이 나오는데 이 또한 별미다.

여수를 넘어 전국구 맛집이 된 ‘나진국밥’ ⓒ이병철

여수에서도 외진 곳에 속하는 화양면에 ‘나진국밥’이 있다. 가수 성시경이 극찬하면서 널리 알려졌지만 그전에도 이미 지역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던 집이다.

이 집에서는 꼭 수육과 국밥을 모두 시켜야만 한다. 야들야들하게 삶아낸 수육을 데친 미나리와 함께 내는데, 돼지고기 한 점을 미나리로 칭칭 감아 들깨장에 찍어 먹는 게 왕도다. 돼지고기와 콩나물, 부추, 청양고추가 들어간 국밥은 양념장을 넣어 칼칼하게 끓여 내는데, 역시 낮술을 부른다.

최고의 술안주, 여수 해물삼합 ⓒ이병철

술안주로는 여수 해물삼합만한 게 또 없다. 종포해양공원 일대의 낭만포차거리가 잘 알려져 있지만, 관광지 물가라선지 지나치게 비싸다.

나는 삼합 생각이 나면 서교동 서시장 23번이나 24번집을 찾는다. 키조개관자, 삼겹살, 문어 혹은 낙지를 묵은지와 함께 볶아 먹는 메뉴다. 여기에 새우가 추가되기도 한다. 파라솔을 편 노상 테이블에 앉아 삼합이 지글지글 익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아… 비까지 내린다면 그날 밤은 그냥 죽자는 얘기다.

문수동 뗏목 선어회 한상 ⓒ이병철

여수 사람들은 예로부터 활어회보다 선어회를 더 즐겨 먹었다. 여러 집들이 있지만 문수동 ‘뗏목’은 현지인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는 집이다.

삼치, 병어, 자리돔, 전어 등으로 구성된 선어회 한 접시가 푸짐하다. 여기서 선어회 안주 삼아 지역 소주인 ‘잎새주’를 홀짝이면 뗏목을 타고 우주까지 노 저어 가는 황홀감에 든다. 진짜다.

평원가든 염소수육과 염소탕 ⓒ이병철

소라면에 위치한 평원가든에서 흑염소 수육까지 먹으면 여수 여행은 식도락을 넘어 자양강장 여행이 된다. 그도 그럴 것이 갯장어, 붕장어, 돼지고기, 온갖 해물에다 몸에 좋기로 소문난 흑염소까지 먹는데 피로며 더위 따위가 어딜 감히 덤비겠는가. 흑염소 수육을 주문하면 따로 시키지 않아도 널찍한 냄비에 푸짐하게 담긴 탕이 제공된다. 1인 2만7천원에 수육과 탕을 든든하게 먹을 수 있으니 합리적이다.

마지막으로 수제버거다. 여수까지 가서 웬 수제버거냐 할 수도 있겠지만, 중앙동 이순신 광장에 위치한 ‘이순신 수제버거’는 여수에서 꼭 먹어봐야 할 ‘로컬 푸드’다. 시그니처인 이순신버거를 비롯해 베이컨토마토치즈버거, 이순신에그버거, 더블자이언트버거 등이 있다. 두툼한 빵에 직접 만든 소고기 패티와 싱싱한 양상추, 양파, 토마토, 피클, 치즈를 가득 끼워준다. 버거 한 개에 만 원이 훌쩍 넘는 유명 수제버거집들보다 훨씬 맛있고, 든든하고, 싸다. 가장 인기 있는 이순신버거가 4500원밖에 하지 않는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터진만두 만두전골, 감성카페 ‘카페공감’, 여수에서 흔치 않은 칵테일 바 ‘라노체’ ⓒ이병철

11미 외에도 ‘터진만두’ 만두전골, ‘진남식당’ 낙지꽃게탕, ‘서울해장국’ 김치찌개 등이 여행객을 유혹한다. 안산동 ‘가치커피’, 섬달천 ‘어느 멋진 날’, 웅천동 ‘카페공감’, 남산동 ‘그해 남산동65번지’는 맛과 감성을 모두 충족시켜주는 카페들이다. 한편 학동 ‘라노체’는 여수에서 드문 칵테일바로 다양한 칵테일과 함께 싱글몰트 위스키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자, 지금까지 숨 가쁘게 여수 10미, 아니 여름 한정 여수 11미를 노래해 봤다. 글을 쓰는 내내 입에 침이 고이고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안 되겠다. 다음 주에 당장 여수에 가야겠다. 맛있는 음식도 간절하지만, 타오르는 남도의 여름빛 아래서 파란 숨 실컷 쉬고 싶다. 돌산대교 건너며 눈앞에 펼쳐질 여수 바다를 ‘원샷’하고 싶다. 트림 한번 시원하게 하고 나면 협소한 서울살이로 꽉 막힌 가슴이 좀 트이지 않을까.

오동도의 부윰한 저녁놀 ⓒ이병철


글·사진=이병철(시인·문학평론가)

정리=더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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