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사지고, 물 쉽게 빠지고…악조건 청산·제주·울릉도에서 농사 지은 비결은? [재미있는 농업이야기 32]

우리나라에 있는 국가중요농업유산은 17개소다. 이 가운데 완도 청산도 구들장논, 제주 밭담, 울릉 화산섬 밭농업은 섬 지역에 있는 농업 유산이다. 세 지역 모두 토양, 기후, 지형 등 환경 측면에서 농사짓기가 아주 힘든 곳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살라온 농부들은 농업 활동에 불리한 환경적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창의적인 농업기술을 고안해 여러 세대에 걸쳐 농사를 이어오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2018년 1월 울릉 화산섬을 국가중요농업유산 제9호로 지정했다. ⓒ뉴시스

불 대신 물 흐르는 아궁이가 있다

아궁이를 닮은 청산도 ‘구들장논’

청산도는 경사지가 많은 데다 돌이 많고, 물이 쉽게 빠지는 토양이라 논농사를 짓기 어렵다. 농부들은 이렇게 불리한 농업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독특한 논 개간 기술과 지하 통수로를 이용한 관개기술을 고안해 섬 곳곳에 구들장논을 만들었다. 16세기 말에 시작해 20세기까지 개간해온 구들장논은 토지와 수자원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전통농업 기술의 산물이다. 2013년 국가중요농업유산으로 지정됐고, 2014년에는 세계식량농업기구(FAO)가 선정하는 세계중요농업유산(GIAHS)으로 등재됐다.

구들장논은 경사지 하단부 논둑을 석축으로 쌓고, 논바닥에 구들을 놓듯 넓적한 돌을 놓아 그 위에 돌과 흙을 다지는 방식으로 조성한다. 구들장논의 구조는 전통 온돌과 비슷하다. 온돌이 방바닥 전체에 구들을 깔고 아궁이에서 나온 열을 전달하는 방식이라면, 구들장논은 바닥에 크고 작은 돌을 쌓고 아래쪽에 아궁이를 닮은 통수로를 만들어 불의 세기를 조절하듯 물의 양과 물길의 방향을 조절한다.

청산도 구들장논은 돌을 쌓아 경사면 흙이 쓸려나가지 않게 막고, 토양 비옥도를 높인다. ⓒ농업진흥청

구들장논은 청산도에서도 사질 토양이 많은 동부지역에 주로 형성돼 있다. 석축은 돌을 성기게 쌓아 물과 흙의 압력에 의해 논둑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한다. 논바닥에 쌓는 돌의 크기는 논 앞에서 뒤로, 하부에서 상부로 갈수록 작아진다. 석축 높이는 지형의 경사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1∼1.5m이고 높은 것은 3m에 이른다. 경사가 심해 석축이 높아지면, 중간 부분에서 조금 안쪽으로 ‘중대’라고 하는 석축을 들여쌓아 더욱 튼튼하게 한다.

석축 아래 지하에는 암거형 통수로가 설치된다. 윗논에서 아랫논으로 물을 보내주는 수구 역할을 하는 통수로는 물의 흐름을 고려해 석축의 하부나 중간에 물이 빠질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한 후, 그 위에 구들장 모양의 판석을 얹어 정방형으로 만든다. 통수로는 대개 안쪽으로 3∼10m 깊이로 뚫려있고, 통수로 앞에는 좁은 수로인 ‘샛똘’을 설치한다. 윗논에서 흘러 내려온 물을 아랫논에 댈 때는 샛똘을 열고 물을 댈 필요가 없을 때는 물길을 막아 아랫논으로 바로 흘려보낸다.

돌을 쌓아 만든 구들장논 논둑과 통수로다. 통수로는 윗논에서 아랫논으로 물을 보내주는 역할을 한다. ⓒ농업진흥청

구들장논 토양층은 물이 밑으로 빠지지 않도록 ‘밑복글물잡기’라고 하는 혼합토층으로 조성한다. 작은 돌과 흙을 혼합해 두께를 20∼30㎝로 깔고 물을 넣어가며 괭이나 삽을 이용해 다지고 메꾸는 과정을 반복하는데, 완료되기까지 15일가량 소요된다. 혼합토층 위에는 ‘윗복글’이라고 하는 표토층을 20∼30㎝ 두께로 덮는 복토를 해 작물이 자랄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 준다.

구들장논을 만드는 일은 돌과 흙을 나르고 쌓아 다지는 과정을 반복해야 하는 힘든 일이다. 그래서 가족 모두가 나서거나 마을 사람들이 힘을 보태주어야 한다. 작은 구들장논 하나를 만드는 데 수개월 또는 1∼2년의 시간이 걸린다. 구들장논을 관리하는 과정에서도 협업은 필수이고, 그 과정에서 돈독한 공동체가 형성된다.

제주도엔 만리장성보다 긴 담이 있다고?

흑룡 비늘만큼 강한 ‘밭담’으로 밭 지킨다

제주 밭담은 마치 흑룡이 꿈틀대는 모양으로 길게 이어져 있다고 해서 ‘흑룡만리’로 불리기도 한다. ⓒ농업진흥청

제주도 농부들은 오랜 옛날부터 농사를 지으려면 품을 들여 돌을 캐내야 했고, 그 돌로 밭담을 쌓았다. 돌은 극복의 대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소중한 자원이었다. 그렇게 조성된 밭담은 바람을 갈무리해 토양과 씨앗의 유실을 방지하고 작물이 쓰러지는 것을 막아주면서 경작지 구획, 토양 보습과 보온, 소나 말의 침입 방지, 생물다양성 보존, 농업문화 보전 등의 다양한 기능을 수행해왔다.

밭 경계를 따라 끝도 없이 이어진 현무암 밭담은 마치 흑룡이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여 ‘흑룡만리’라 불린다. 만리장성(6,400km)보다도 훨씬 긴 제주 밭담(22,108km)은 아주 독특하고 경이로운 농업 경관으로, 2013년 국가중요농업유산으로 지정됐고, 2014년에는 세계중요농업유산에 등재됐다.

밭담은 제주도 밭농업의 핵심요소이다. 바람이 세고 비가 많이 오는 기후와 화산회토가 대부분인 토양 환경에 적응해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밭담이 필수적인 선택이었다. 바람은 토양 속 수분을 증발시켜 씨앗의 발아와 유기물의 토양화를 어렵게 한다. 강한 바람은 지표면의 흙을 날려 파종한 씨앗을 땅 위로 드러나게 하고, 성장한 작물을 쓰러트리기도 한다. 특히 여름철 비바람을 동반한 태풍과 집중호우는 토양 유실의 주요 원인이다. 비는 경작지 토양을 쓸어가 농사를 망치게 한다. 이렇게 열악한 농업환경에서 밭담은 흙의 유실을 막아내는 일등공신이다.

제주 밭담에 쓰인 돌은 모양과 크기가 가지각색이다. 작은 돌과 큰 돌은 서로 맞물려 견고한 담을 이룬다. ⓒ농업진흥청

제주 밭담은 주로 개인이나 가족 단위로 쌓는다. 돌과 돌이 잘 맞물리도록 쌓아 올리기만 하면 되는 단순한 구조라서 어려운 작업은 아니다. 그렇다고 아무나 쌓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능숙하게 쌓기 위해서는 오랜 경험이 필요하다. 밑돌을 놓고 서로 이가 맞도록 돌을 엇갈리게 쌓는 기술과 돌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가장 적합한 위치에 올려놓는 감각이 있어야 한다. 바람과의 관계를 고려해 일정하게 빈틈을 확보하면서 돌들이 맞물리도록 쌓는 것인데, 오랜 경험만이 이를 가능하게 해준다.

밭담의 구조적 특징은 돌의 형태나 크기가 아주 다양하다는 데 있다. 제대로 밭담을 쌓으려면 큰 돌, 작은 돌, 밋밋한 돌, 모난 돌, 둥글둥글하면서 넓적한 돌들이 모두 필요하다. 각각의 돌들이 저마다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큰 돌만 쓰면 육중한 느낌은 있지만, 돌과 돌을 이어주는 이음새 역할을 하는 돌이 없게 되고, 바람이 닿는 면적이 넓어져 버틸 수 없게 된다. 보잘것없는 작은 돌을 큰 돌과 함께 쓰면 작은 돌 하나하나는 바람에 약하지만, 이들이 서로 이음새 역할을 해줘 견고한 밭담이 되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 허술해 보이지만 아주 강한 바람에도 밭담은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다. 유선형으로 축조된 밭담이 바람의 저항을 줄여주고, 돌과 돌 사이에 뚫려있는 구멍이 바람을 찢어 저항을 감소시키기 때문이다. 또한 밭담에 쓰이는 현무암은 기공이 많아, 서로 몸을 기대고 있는 돌들 사이에 마찰력이 커 담을 이루었을 때 쉽게 밀리거나 무너지지 않아 밭담을 더욱 견고하게 해준다.

울릉도 정착 비결은 60° 넘는 비탈밭

아무리 경사져도 산나물이 꽉 붙드니까!

울릉 화산섬 급경사지 밭농업 전경이다. 인구가 많아지며 농경지로 쓸 평야가 줄어들자, 급경사지에 농사지은 것에서 시작했다. ⓒ농업진흥청

울릉도는 1417년 조선 태종이 공도정책을 시행해 500년 가까이 사람이 살지 않은 섬이었다. 울릉도 농업은 고종이 공도정책을 폐지하고 섬을 개척하면서 본격화됐다. 1883년 처음으로 16가구 54명의 주민이 섬에 정착했다.

당시 강원도 관찰사는 개척민들을 위해 선박 4척과 볍씨 20석, 콩 5석, 조 2석 등을 내줬고 가마솥, 그릇, 베, 짚신, 항아리 등과 목수 2명, 대장장이 2명을 동승시켰다. 또한 농사에 쓸 소와 이주민을 보호할 총, 창, 화약 등을 함께 보냈다. 이렇게 입도한 이주민들은 유일한 평지인 나리분지에 주거를 마련하고 산나물로 끼니를 대신했다. 나리분지는 이들이 섬말나리로 끼니를 때운 것에서 기인한 지명이며, 명이나물은 겨우내 굶주렸던 사람들이 눈이 녹자마자 뜯어먹고 연명한 것에서 기인한 이름이다.

섬에 정착한 이들은 초기에는 화전개간을 통해 옥수수, 감자, 조 등을 심었다. 하지만 조류와 설치류에 의한 피해와 가뭄으로 인해 식량 수급에 어려움을 겪었다. 인구가 증가하자, 급경사지를 개간했다. 농부들은 개간할 때부터 산림의 훼손을 최소화하기 위해 연속되지 않고 집중되지 않은 조각 형태로 농경지를 조성해 당귀, 천궁, 산마늘 등의 환금작물과 산채를 재배했다.

울릉도 나리분지 명이나물 밭. ⓒ농업진흥청

산채는 산간 경사지에 가장 적합한 작물로, 농부들은 산에서 자생하던 산채를 옮겨 심거나 씨를 받아 개간한 밭에 뿌렸다. 이렇게 자라난 산채는 경사지의 토양유실을 방지해 줬다. 또한, 척박한 토양에 양분을 공급해 주기 위해 농가마다 소를 키워 축분을 이용했고, 철 지난 산채는 소 사료로 쓰거나 퇴비로 이용했다.

울릉도는 화산 토양으로 표토가 얕아 비가 많이 오면 암반사면 붕괴와 산사태가 자주 발생한다. 경사각이 20°에서 최고 60° 이상인 급경사지가 64.4%를 차지하고 있는 울릉도 농경지는 토양침식에 아주 약하다. 이러한 토양 유실을 최소화하는 방안으로 작물 피복, 다년생 작물 재배, 등고선 경작 등이 적용됐고, 농부들은 산나물을 선택해 재배했다. 산나물은 산사태를 막아 산림을 보호해 줬고, 산림은 부식된 유기물을 경작지로 내려보내 작물의 성장을 도와줬다. 농부들은 등고선을 따라 두둑을 만들어 토양 유실을 막기 위해 그곳에 억새와 수목을 심었다.

산채를 중심으로 한 경사지 밭 농업은 울릉도 농업의 근간이 됐다. 5대 산채인 부지깽이, 산마늘, 미역취, 삼나물, 참고비는 울릉도 전역에서 재배해 울릉도 농업소득의 85%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울릉도 화산섬 밭 농업은 섬사람들의 지혜를 잘 보여주는 농업유산으로 2017년 국가중요농업유산 제9호로 지정됐다.


글=정명철 국립농업과학원 농촌환경자원과 농업연구사

정리=더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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