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시인은 2014년 문예지 『시인수첩』의 신인상 시 부문, 『작가세계』의 신인상 문학평론 부문에 각각 당선돼 작품 활동을 시작한 젊은 문학인입니다. 그는 시 쓰기와 문학평론 외에도 강의, 낚시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창작의 고통과 삶의 무게가 다가올 때 어디론가 훌쩍 여행을 떠납니다.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자연을 만나고, 여행지의 정서와 감동을 사진과 글로 담고 있습니다. 더농부는 그가 풀어내는 ‘길에서 부르는 노래’를 격주로 전해드립니다. 젊은 시인이 한국의 명소와 맛집을 다니며 보고 느낀 것들을 함께 즐겨보시면 좋겠습니다.
‘포항’이라고 발음하면 군대에서 덮고 자던 모‘포’가 떠오르고, 어린 시절 마당 장독대에서 햇살과 잠자리와 배추흰나비를 불러 모으던 ‘항’아리가 생각나 이내 따뜻해진다. 포항은 내게 따스한 항구 도시, 매년 겨울마다 몸과 마음을 쉬러 즐겨 찾는 여행지다. 주로 겨울 바다의 진객인 볼락을 만나기 위해서인데, 12월부터 2월까지는 왕복 750km의 장거리 운전도 마다하지 않고 거의 매주 드나들 정도다.
겨울 포항에 오면 늘 정해진 코스대로 움직인다. 새벽에 도착해 방파제에서 낚시하다 동해가 쏘아 올린 황홀한 해돋이를 감상한다. 볼락을 꽤 잡았으니 구룡포에서 모리국수로 속을 얼큰하게 채우거나 죽도시장 장기식당에 가 소머리곰탕을 먹는다. 낮 동안엔 영일대 해수욕장의 볕 좋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쩡쩡 얼어붙은 오어사 계곡 구경을 가거나 구룡포에 있는 호미곶온천랜드에서 낮잠을 잔다. 때로는 ‘철규분식’ 찐빵이나 죽도시장 호떡 군것질을 하기도 한다. 그러다 해거름에 다시 낚시를 하고, 밤엔 볼락 뼈회와 매운탕, 시장에서 산 대게 몇 마리 곁들여 만찬을 즐기는 식이다.
제주 사람들은 한라산을 기점으로 섬의 북쪽을 산북, 남쪽을 산남이라 부른다. 나는 산북의 활기참과 산남의 호젓함을 모두 사랑한다. 제주도에 일주일쯤 가게 되면 사흘은 제주시에서, 나머지 사흘은 서귀포시에서 보낸다. 포항에 올 때도 마찬가지다. 제주도처럼 북쪽과 남쪽이 서로 다른 두 매력을 뽐내는 여행지가 바로 포항이다. 포항은 북구와 남구로 나뉜다. 북구에 죽도시장과 영일대해수욕장이 있다면 남구엔 구룡포와 호미곶이 있다.
남구로 먼저 향한다. 구룡포 가는 길은 언제나 설렌다.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한 바다’라는 전설도 가슴 뛰게 하지만, 내게 구룡포는 아홉 가지의 보물이 있는 바다다. 과메기, 볼락, 대게, 문어, 모리국수, 찐빵, 삼정 해수욕장, 근대 문화 역사거리, 해돋이가 나만의 아홉 가지 보물이다.
구룡포에 도착하자마자 모리국수 식당부터 찾았다. 50년 넘게 장사를 해온 ‘까꾸네 모리국수’는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는 맛집이다. 주인인 이옥순 할머님이 50여 년 전 구룡포 수협 뒷골목에 판자때기를 얼기설기 덧대어 국숫집을 연 게 ‘까꾸네’의 시초다. 동네 사람들로부터 “까꿍, 까꿍” 귀여움을 받던 막내딸 별명이 ‘까꾸’여서 까꾸네가 됐다고 한다.
여러 번 가봤는데도 또 어김없이 길을 헤맨다. 미로 같은 골목 몇 개를 헷갈리는 동안 국수 생각은 더 간절해져 침이 잔뜩 고인다. 어렵사리 문을 열었다. 모리국수 2인분 한 냄비에 14000원, 양은 냄비가 팔팔 끓어오르면 얼큰한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한다. 추운 겨울날 먹으면 얼어붙은 마음까지 녹여준다.
어부들이 어판장에서 팔고 남은 생선으로 ‘잡탕 국수’를 끓인 게 모리국수의 시작이라고 한다. ‘모리’의 어원에 대해서는 견해가 분분하다. 뭐가 들어갔는지 ‘모린다’고 해서 모리, 이것저것 ‘모디’ 들어갔다고 해서 모리, 생선 머리가 들어갔다고 해서 모리, 이것저것 ‘몰아’ 넣었다고 해서 모리, ‘빽빽하다’는 뜻의 일본어 발음으로 ‘많다’를 의미한다는 설도 있다.
어원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맛있는 음식 앞에선 사유나 이성보다 감각과 본능이 먼저 작동하기 때문이다. 매운 국물 잔뜩 머금은 칼국수를 크게 한 젓가락 집어 후루룩 빨아들임과 동시에 아귀 살 한 점을 입에 넣었다. 고난도 기술이다. 칼국수와 아귀 살을 한꺼번에 우물거리는 동안 입 안엔 바다 향기가 가득 번지고, 이마와 목덜미는 땀으로 흥건히 젖었다.
풍족하지 않던 시절, 한 냄비의 모리국수를 나눠 먹는 어부들의 이마에도 땀이 송골송골 맺혔을 것이다. 그 열기는 사시사철 반갑고, 국수는 사람을 들뜨게 한다. 옛 시인이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싸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백석, ‘국수’)라고 했을 때, 그렇다. 국수는 즐거운 손님처럼 우리 일상으로 온다. 나는 모리국수를 먹으며 백석의 시를 바꿔 외운다. “이 불그스레하고 부드럽고 칼칼하고 얼큰한 것은 무엇인가”라고.
입 안이 뜨겁고 울긋불긋할 때는 달큼한 디저트를 먹어야 진화가 된다. 까꾸네에서 나와 다시 골목 몇 개를 지나 구룡포 시장 뒷길로 가면 장사를 시작한 지 70년 된 ‘철규분식’이 있다. 까꾸네와 마찬가지로 집안 어린아이 이름을 상호로 쓴 것인데, 그것도 70년 전 얘기다.
‘철규’는 이 집 주인 할머니 동생, 가게를 처음 열 땐 초등학생이었지만 지금은 칠순을 훌쩍 넘긴 어르신이다. 주문을 받고 음식을 나르던 할아버지는 철규 어르신의 매형 되시는데, 안타깝게도 몇 해 전 세상을 떠나셨다. 노부부는 오랜 세월 동안 한 자리에서 단팥죽과 찐빵, 그리고 잔치국수를 팔아 왔다. 이제는 입소문도 나고 또 ‘노포(老鋪)’ 식도락이 유행하면서 주말에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는 집이 됐다.
찐빵 여섯 개와 단팥죽 한 그릇을 시켰다. 단돈 5000원. 찐빵 한 입 베어 무는데 느닷없이 뭉클해져 혼났다. 이 집에서는 음식만 먹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마음을 함께 먹는다. 1952년, 학교를 마치고 온 어린 막냇동생을 위해 국수 삶고 빵 찌고 팥죽 끓이던 그 애틋한 마음이 60년 넘도록 맛의 비법이 됐다. 이 집에서 단팥죽을 먹은 사람은 누구나 ‘철규’가 된다. 얼마나 더 많은 철규들이 이 집을 찾아오게 될까? 아니, 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철규가 될 수 있을까?
서둘러 단팥죽을 들이켜고 일어섰다. 미닫이문을 여는데 낡은 도어레일에서 끼익 끽, 기차 멈추는 소리가 났다. 문을 나서자 구룡포는 다시 2022년의 겨울이었다.
구룡포에 오면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 미로 같은 골목들을 지나다 보면 시간의 타래도 이리저리 뒤엉킨다. 까꾸네와 철규분식 등 노포에서 나와 근대 문화 역사거리에 이르면 시간이 정말 거꾸로 흐르는 것 같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동해안 황금어장을 노리고 이곳에 항구를 지었는데, 어업의 호황으로 부자가 되자 여관과 술집 등을 열었다. 1945년 패망 직후 일본인들은 떠났지만, 그 흔적은 아직 남아 있다.
‘일본인 가옥 거리’로 흔히 알려진 구룡포 근대 문화 역사거리에는 일본인들이 살던 적산가옥과 일본풍의 찻집, 주점, 음식점 등이 늘어서 있다. 특히 ‘고향 집’이라는 뜻의 전통찻집 ‘후루사토야’는 1924년에 지어진 일본식 목조가옥인데, 다도(茶道)와 함께 한복, 기모노, 유카타 등 한국과 일본의 전통의상을 체험해볼 수 있다. 기모노와 유카타를 빌려 입고 1930년대 목조건물들을 배경으로 사진 찍는 것은 구룡포를 찾는 젊은 여행객들의 놀이문화가 됐다. 사진 명소로 인기 있는 빨간 우체통 앞은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려는 20대들로 붐볐다.
근대 문화 역사거리에서 계단을 오르면 ‘포항 구룡포 과메기 문화관’이 나타난다. 구룡포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있다. 이곳에서도 시간 여행은 계속된다. 과메기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모두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2016년에 개관한 과메기 문화관은 체험관과 영상관, 전시실, 전망대, 카페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추어 포항의 새로운 테마관광 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과메기 빵, 과메기 강정, 훈제 과메기, 과메기 바질페스토 등 ‘퓨전 과메기 요리’를 맛보니 그야말로 과메기 맛의 신세계다. 과메기가 이토록 다채로운 변신을 할 수 있다니, 식재료로서 과메기가 지닌 무한한 가능성을 확인하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시 계단을 내려와 구룡포 시장에 들렀다. 죽도시장만큼 북적거리진 않지만, 여전히 활기차 손님도 신이 난다. 홍게 몇 마리와 작은 참문어를 사서는 삼정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삼정 바다의 깨끗한 물빛과 고요함에 반한 게 벌써 몇 해 전이다. 매년 겨울마다 이곳에 와 단골 민박집에서 묵는데, 아침마다 주인 할머니께 얻어 마시는 식혜 한 사발이 얼마나 달고 시원한지 모른다.
몸에 불이 붙은 사자가 온 하늘에 불꽃을 흩뿌리는 형상이 서해의 낙조라면 동해의 해거름은 엄지손톱에 든 봉숭아 물의 색감을 지녔다. 삼정리 저녁 바다를 거니는 동안 부윰한 분홍빛이 내 마음에 꽃물을 들였다. 차르르르 밀려오는 파도에 가만 귀를 대니 돌아오지 않는 먼 시절, 사랑하는 이가 찬물에 손 씻던 소리가 들렸다.
민박집 마루에 문어와 홍게로 푸짐한 저녁상이 차려졌다. 구룡포의 아홉 가지 보물 중 볼락과 해돋이만 빼고 다 수집한 하루를 알뜰히 자축했다. 볼락과 해돋이는 내일 만날 것이다.
글·사진=이병철(시인·문학평론가)
정리=더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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