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대’ 하면 어떤 순대가 머릿속에 떠오르나요? 아마 가장 많은 사람이 떠올리는 순대는 보랏빛이 살짝 감도는 검은색 당면순대일 것 같습니다. 전국 어디든 분식집이나 순댓국집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순대죠. 쫄깃∙탱글한 매력과 부담 없는 가격 덕에 떡볶이, 김밥과 함께 국민 음식으로 꼽히는 메뉴입니다.
그런데 순대를 좀 아는 사람은 이 ‘국민 순대’보다는 지역별 특색이 살아있는 다양한 순대를 즐긴다고 합니다. 심지어 미쉐린 가이드 서울 2023에 선정된 가게 중에는 순대를 오마카세로 만날 수 있는 곳도 있습니다.
‘맡김 차림’이라고도 하는 오마카세는 정해진 메뉴 없이 셰프가 그날그날 식재료와 요리 방법, 메뉴 구성을 바꿔서 제공하는 식사를 뜻하는 일본어입니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제철 생선으로 요리를 만드는 초밥 가게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방식입니다. 순대도 이런 식사가 가능할 정도로 종류가 다양합니다.
순대가 주인공인 오마카세에서 어떤 순대를 만나면 반가울지 한 번 상상해보세요. 순대 종류를 잘 몰라서 생각이 안 난다고요? 그렇다면 지금부터 더농부가 지역별 순대 특강을 시작하겠습니다.
순대는 쫄깃하다?
명태 순대는 보드랍다
오늘 특강은 한반도 윗부분부터 아래로 내려가는 순서로 진행하겠습니다. 첫 번째 지역은 한반도에서 가장 북쪽인 함경도입니다.
옛날 옛적 고려시대에 명태가 임금님 수라상에 오른 날이 있었습니다. 임금님은 명태 맛에 반해 이것이 무슨 생선인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신하가 함경도 명천에 사는 태 서방이 잡은 생선이라고 답했습니다.
임금님은 지역과 어부 이름에서 앞 글자를 따 ‘명태’라는 이름을 지어줬습니다. 이렇게 명태와 연이 깊은 지역답게 함경도 순대는 명태를 활용해서 만듭니다.
2017년 6월 4일에 방영된 SBS 예능 프로그램 ‘미운 우리 새끼’에 출연한 함경도 출신 방송인 이소율이 명태 순대를 만드는 방법을 소개했습니다. 명태 순대를 만들려면 먼저 생태를 소금에 하룻밤 재워야 합니다. 그다음 생태 아가미를 벌리고 양쪽 아가미 사이를 칼로 갈라서 구멍을 만듭니다. 이 구멍을 통해 뼈와 내장을 제거합니다.
손질을 마친 다음에는 순대 소를 넣습니다. 소를 넣을 때는 생태 배가 터지지 않게 잘 넣어야 합니다. 명태 순대 소에는 쌀, 돼지고기, 배추, 시래기 등과 함께 명태알과 내장이 들어갑니다. 완성된 명태 순대는 동태처럼 꿰매서 밖에 얼려 두다가 필요할 때 조금씩 쪄서 먹습니다.
이소율의 말에 따르면 명태 순대는 북한에서 부자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고 합니다. 쫄깃쫄깃한 창자가 아니라 포슬포슬한 명태 살로 감싼 순대이기 때문에 어린 아이나 노인도 먹기 좋을 것 같습니다.
전쟁 때문에 탄생한 순대
그 속에서 하나 되는 남북
다음은 강원도 순대입니다. 그런데 함경도 식 강원도 순대입니다. 어쩌다가 두 지역이 섞인 음식이 탄생했을까요?
1950년 6∙25전쟁이 터진 이후 많은 사람이 목숨을 지키기 위해 남으로 북으로 옮겨 다녔습니다. 함경도 주민은 함경도와 가장 가까운 속초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죠.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리며 바닷가에서 옹기종기 모여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그날은 오지 않았습니다. 실향민이 된 함경도 사람들은 고향 음식을 만들어 먹으면서 그리움을 달래고는 했습니다. 하지만 전쟁 때문에 급하게 떠나온 살림이 넉넉하지는 못했겠죠. 항상 해오던 대로 명태 순대를 만들기엔 점점 비싸지는 명태가 부담스러워졌습니다.
그래서 명태 대신 오징어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찹쌀, 고기, 야채 등을 버무려 만든 순대 소를 다리만 떼어낸 오징어 몸통에 채워 넣으면 오동통한 오징어순대가 됩니다. 본래는 오징어순대를 담백하게 쪄낸 다음 바로 잘라서 먹었지만, 요즘은 달걀물을 묻혀 동그랑땡처럼 기름에 부칩니다.
오징어가 아닌 돼지 대창에 순대 소를 채워 먹는 아바이순대도 있습니다. 다른 전통 순대는 보통 돼지 소창으로 만드는데, 아바이순대는 대창을 써서 매우 큽니다. 씹는 맛도 다르죠.
오징어순대와 아바이 순대는 강원도에 가면 꼭 먹어야 하는 음식으로 꼽힙니다. 고향을 향한 애틋한 마음이 담긴 음식이라 맛도 좋은가 봅니다. 비록 한반도는 둘로 나뉘어 있지만, 순대 속에서는 남북이 하나 돼 맛있는 작품을 만들어 냈습니다.
죽성 순대가 될 뻔한
수도권 순대 대장
아파트 단지나 길거리에서 백암 순대 트럭을 본 적 있나요? 서울, 경기, 인천 지역 주민은 아마 한 번쯤 마주친 적 있을 거예요. 백암 순대 트럭이 수도권에서 많이 발견되는 이유는 백암 순대가 경기도 용인 지역 음식이기 때문일 겁니다.
원래 백암 순대는 용인 바로 옆 경기도 안성시에 있었던 죽성 지역에서 만들어 먹던 음식입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죽성 지역이 점점 약해지면서 사람도 줄어버렸죠. 다행히 근처에 있는 용인 백암 시장에서 사람들이 순대를 계속 만들고 먹은 덕분에 백암 순대는 사라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백암은 용인에서 돼지를 가장 많이 키우는 곳이라 순대 재료를 구하기 좋습니다. 그 덕분인지 백암 순대는 여전히 순대 껍질로 돼지 소창만을 고집합니다. 값싸고 손질이 필요 없는 식용 비닐을 사용하는 일반 순대와 대조됩니다. 순대 속에 채소가 많고 당면으로 빡빡하게 채우지 않아서 순댓국에 넣으면 국물이 잘 스며듭니다.
순대 세계에 입문한다고요?
담백한 병천 순대를 추천합니다
충청남도 천안시 음식인 병천 순대도 백암 순대처럼 채소가 많이 들어가지만, 종목이 다릅니다. 백암 순대는 호박, 부추, 숙주, 콩나물 등이 들어가는데, 병천 순대는 주재료인 양배추와 함께 양파, 대파 등이 들어갑니다. 입문용 순대라고 불릴 정도로 깔끔하고 담백한 맛이 특징입니다.
천안은 경기, 충청 등에서 사람들이 드나드는 교통 요충지입니다. 병천 장이 열리는 날이면 다양한 지역에서 모인 사람들로 북적북적해지죠. 빠르게 먹을 수 있으면서 속은 든든하게 채울 수 있는 순댓국이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는 곳이었습니다.
게다가 1960년대 이후에는 읍내에 햄 공장도 생겼습니다. 햄을 만들고 남은 돼지 내장을 시장 사람들이 활용할 수 있게 됐죠. 병천 순대는 이런 환경 덕분에 유명해질 수 있었습니다.
붕어 없는 붕어빵, 국화 없는 국화빵
암뽕으로 안 만드는 암뽕 순대
마지막은 전라남도의 암뽕 순대입니다. 암뽕? 이름만 들어서는 무엇인지 감이 안 오는 분도 있으시죠? 암뽕은 암퇘지의 자궁 부위를 부르는 말입니다. 암뽕 순대라고 하면 암뽕에 속 재료를 넣어서 만드는 순대일 것 같지만, 아닙니다. 그냥 이 암뽕을 삶아서 순대와 함께 내놓는 음식입니다.
그럼, 순대 자체는 특별한 점이 없냐고요? 물론 있습니다. 암뽕 순대로 나오는 순대는 막창으로 만듭니다. 막창은 돼지 소화기관 중 가장 마지막 부위이죠. 아바이 순대에 쓰는 대창처럼 쫄깃한 식감이 특징입니다. 막창은 특유의 냄새가 나기 쉬운 부위이기 때문에 신선한 것을 잘 세척해서 써야 합니다.
다양한 특색이 살아있는 순대! 각 지역 역사를 곁들여 알아보니 흥미롭습니다. 이번 글에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여러분이 알고 있는 맛있는 지역 순대가 있나요? 공유하고 싶은 지역 순대가 있다면 댓글로 알려주세요!
더농부 인턴 방정은
제작 총괄 : 더농부 에디터 나수연
nong-up@naver.com
더농부
참고=
SBS 미운우리새끼 39회
동아일보, <‘조선의 물고기’ 명태 유래담[김창일의 갯마을 탐구]〈90〉>
한경키즈맘, <입춘에 먹는 ‘명태순대’와 ‘오신채’는 어떤 음식?>
중부일보, <[우리동네 맛시장] 담백한 순대∙백옥쌀 떡에 군침이 절로…용인중앙시장>
서울경제, <[리빙 앤 조이] 속초의 별미>
농민신문, <[향토밥상] 선지·채소 꽉 채운 병천 순대국…손님 속도 든든히 채워주네>
오마이뉴스, <’햄 공장’ 덕분에 병천순대가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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