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와 파리지앵이라는 단어를 보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빵 모자를 쓴 파리지앵이 종이봉투에 바게트 빵을 담고 에펠탑 앞을 걷는 모습이 생각나지 않나요? 국내 베이커리 브랜드 ‘파리바게뜨’만 보아도 프랑스 음식으로서 바게트 빵이 지니고 있는 대표성과 상징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에서 바게트 빵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까지 나서서 바게트 빵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데요. 대체 무슨 일일까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프랑스 빵집이 무슨 연관?
2022년 2월 24일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1년째 전쟁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 혼란이 생기고 원료 수급이 불안정해지자 다양한 상품의 가격이 지속적으로 올랐습니다. 국가통계포털 품목별 소비자물가지수에 따르면 2022년 9월 국내 밀가룻값은 2021년 9월 대비 45.4%나 높았습니다. 프랑스 상황도 다르지 않습니다. 밀가루, 버터, 설탕, 포장재 등 제과∙제빵에 필요한 재룟값이 끝을 모르고 올라가는 중입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치명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전기요금입니다. 러시아는 전쟁 발발 이후 유럽 국가에 천연가스 공급을 중단했습니다. 그 영향으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국가 내 에너지 문제가 심각해졌죠.
프랑스 정부는 러시아 석유와 천연가스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에너지 주권을 지킬 방법을 궁리했습니다. 논의 끝에 2005년에 부분 민영화했던 프랑스전력공사(EDF)를 다시 국유화하겠다고 2022년 7월 6일 밝혔습니다. 국유화가 진행되면 국가 차원에서 에너지 수급을 이전보다 잘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자베트 보른 프랑스 총리는 전기료 상승으로 고통받는 국민을 보호하겠다고 말했죠.
이 전기세 ‘실화’?
10배 오른 프랑스 전기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프랑스 동부 부르갈트로프에서 빵집을 운영하는 한 제빵사는 2023년 1월 3일 보도된 AFP와의 인터뷰에서 “작년 한 달에 400유로였던 전기료가 1500유로로 올랐다”고 말했습니다.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약 54만원에서 202만원으로 오른 것입니다. “전기료가 10~12배 뛴 곳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갑자기 다음 달에 우리 집 전기요금이 10배 오른다고 상상하면 정말 충격적이지 않나요?
에너지 주권을 되찾는 중인데 전기료는 왜 반대로 올라버렸을까요? 사실 2020년 기준으로 프랑스 전력 생산에 천연가스 발전이 차지하는 비중은 6.6%밖에 안 됩니다. 이 6.6% 발전에 사용되는 원료 중 러시아 천연가스는 또 겨우 17%입니다.
그럼 프랑스 내 전기 생산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뭘까요? 정답은 원자력으로 생산하는 전기입니다. 그런데 프랑스 전국에 있는 원전 56기 중 상당수가 오래돼 전기를 안정적으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2022년 11월 기준 원전 26기가 유지 보수나 부식 문제로 인해 멈춰 있었습니다. 프랑스내 전력 생산에 자꾸 빨간 불이 켜지는 이유입니다.
더불어, 프랑스 전기요금은 가스 가격에 연동됩니다. 가스나 전기로 오븐에 빵을 구워 내야 하는 프랑스 제빵사들은 원재료와 포장재 값, 에너지 요금 상승이 겹치자 버티지 못하고 줄줄이 폐업하고 있습니다. 직원을 일부 해고하거나 주말에만 영업하는 방식으로 해결하고 있는 빵집은 그나마 사정이 좋은 편입니다. 중고 거래 사이트에는 제빵 설비 판매 게시글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대통령, 총리, 장관 총동원…
소상공인 불 난 민심 잠재우기
제빵사들이 눈물을 머금고 폐업을 해야 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해질 동안 프랑스 정부의 대응은 느렸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2022년에 이어 2023년에도 전기료 인상과 관련해 사업자를 위한 조치를 따로 하지 않았습니다. 일반 소비자가 사용하는 전기료에는 상한선을 둬 부담을 줄인 것과 대비됩니다.
제빵 업계 종사자의 불만이 커지자 프랑스 정부는 늦게나마 순차적으로 대응에 나섰습니다. 1월 3일 브뤼노 르메르 재정경제부 장관은 에너지 공급 관계자들을 불러 대책 회의를 진행했습니다. 1월 5일에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엘리제궁에 모인 파리 제빵사 대표들에게 전기료 기준가 계약을 다시 조정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1월 6일에는 재정경제부가 소상공인을 위한 에너지 대책을 발표했습니다. 재정경제부가 발표한 대책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빵사를 비롯한 프랑스 소상공인은 세금 납부를 미룰 수 있고, 과도하게 에너지 가격을 올린 공급 업체와 무료로 계약을 해지할 수 있습니다. 핵심 문제로 지적된 사업자 전기 요금은 15% 내로만 올릴 수 있도록 제한합니다.
밤샘 근무, 멈춰!
‘워라밸’ 지켜준 바게트
‘내 월급 빼고 다 오르는 시대’라는데, 그럼 상황에 맞게 빵 값도 올리면 되지 않을까요? 프랑스에서 빵, 특히 바게트에는 특별한 사회적 의미가 담겨있어 함부로 빵 가격을 올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빵집들이 아예 문을 닫아버리고 있죠. 무슨 대단한 의미길래 사람 먹고 사는 일보다 우선시하는 걸까요?
프랑스어 사전에 바게트(baguette)를 검색하면 ‘막대기, 지팡이, 지휘봉’이 첫 번째 뜻으로 나옵니다. 바게트 빵의 이름이 길쭉한 모양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이름에 들어갈 정도로 특별하거나 화려한 모양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20세기 초반 프랑스 제빵 노동자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양이었을 것입니다. 바게트 빵이 그들의 워라밸을 현실로 만들어 줬기 때문입니다.
바게트 빵이 등장하기 전까지 프랑스 제빵 노동자는 밤잠을 자지 못하고 일해야 했습니다. 아침 식사 시간에 맞춰 둥근 빵을 만들어내야 했는데, 천연 효모로 이 빵을 만드는 과정은 시간과 정성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1920년 10월, 제빵업자를 보호하기 위해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노동을 금지하는 법이 탄생했습니다. 밤샘 근무가 불가능해지자 기존의 빵 대신 새로운 빵을 고안해야 했는데요. 모양을 길쭉하게 바꾸면 비교적 짧은 시간 내에 빵을 구워 아침 식사 시간에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빵이 바게트라는 설이 유력합니다.
빵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
법으로 레시피를 정해 놓은 빵
바게트 빵과 연관된 또 다른 역사는 빵 평등권입니다. 혁명 시기 이전 프랑스 인은 신분에 따라 먹을 수 있는 빵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귀족은 버터가 듬뿍 들어간 고소하고 부드러운 흰 빵을 먹을 수 있었고, 농민은 거칠고 맛이 떨어지는 흑빵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불평등을 뒤엎고자 혁명에 참여한 사람들은 ‘빵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쳤고 프랑스 혁명은 성공했습니다.
혁명 4년 뒤 1793년, 모든 프랑스인이 같은 품질의 빵을 먹을 수 있도록 제빵업자가 만들 수 있는 빵을 단 한 가지로 통일하는 법이 만들어졌습니다. 고운 밀가루와 호밀을 3:1로 섞어 만들고, 길이는 80㎝, 무게는 300g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구체적인 조건도 있었습니다.
어라, 이거 딱 봐도 바게트 같죠?
바게트 빵이 정확히 어떻게 시작됐는지는 의견이 다르지만, 바게트 빵 속에 프랑스 평등과 자유의 역사가 담겨있다는 점엔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것입니다.
이런 역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현대 프랑스에서 바게트라는 이름으로 빵을 팔기 위해서는 법으로 정한 무게와 길이를 맞춰야 합니다. 가격은 법으로 정하지 않지만 가난한 사람도 사 먹을 수 있는 저렴한 가격에 판매합니다.
두 달 만에 인류문화유산에서
멸종 위기 빵이 된 바게트
프랑스 바게트에는 이렇게 역사 속 수많은 사람의 먹고사는 일이 달려있었습니다. 이제 왜 프랑스 제빵사가 바게트 값을 올리지 못하고 가게 문을 닫아 버리는지 이해가 되죠?
사회적 의미가 가득한 바게트 빵 문화와 장인의 노하우는 2022년 11월 30일에 유네스코 인류문화무형유산으로 등재됐습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이 소식을 듣고 트위터에 ‘우리 일상에서 마법과 같이 완벽한 250g’이라고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쁜 소식이 생긴 지 두 달도 지나지 않아 바게트 빵의 수난 시대가 열렸네요. 공교로운 일입니다.
과연 프랑스는 에너지 주권과 국민, 바게트 빵을 모두 지킬 수 있을까요? 제빵사의 눈물 대신 바게트 빵을 안은 파리지앵을 계속 볼 수 있길 함께 바라봅니다.
더농부 인턴 방정은
제작 총괄 : 더농부 에디터 나수연
nong-up@naver.com
더농부
참고=
뉴시스, <佛, 세계 최대 에너지 기업 EDF 국영화…40여년 민영화 흐름 첫 반전>
경향신문, <프랑스, 민영화한 전력 기업 다시 국유화 추진…우크라이나 전쟁 계기로 ‘에너지 주권’ 강화>
한경국제, <“바게트 못 만들겠다“…프랑스 제빵사들 ‘분통‘ 터뜨린 이유>
연합뉴스, <“바게트 죽일 순 없다” 마크롱, 원가폭등 제빵업자에 구제 약속>
경향신문, <프랑스 장인들의 에너지 위기 문제 불지핀 니스의 제빵사>
경향신문, <치솟는 에너지 가격에 문 닫는 프랑스 식품공장·빵집>
주간경향, <‘오븐이 식는다’ 위기의 프랑스 빵>
수원일보, < [정준성 여민동락(168)] 프랑스 국민빵 ‘바게트‘>
전라일보, <빵의 평등권>
서울경제, < [만파식적] 佛 바게트 대란>
파이낸셜뉴스, <러–우크라 전쟁發 ‘탈원전 탈출 러시‘… 적절한 에너지 믹스 펼쳐야 [2023 신년기획]>
이투뉴스, <절반 멈춰선 프랑스 원전…겨울 전 재가동도 난망>
MBN, <‘원전 비중 70%’ 에너지 위기에도 느긋한 프랑스>
파이낸셜뉴스, <러시아, 독일-프랑스行 천연가스관 잠궈…에너지 대란 현실로>
한겨레, <안정적 발전원이라더니…원전 탓에 더 불안한 프랑스의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