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이 안 좋을 때 옆으로 흘겨보는 눈을 ‘가자미눈’이라고 합니다. 보통 눈이 좌우 대칭으로 달려있는 다른 물고기와 달리 가자미 눈은 한쪽으로 몰려 있기 때문에 생긴 표현입니다.
‘째려보다’ 같은 말보다 어감이 훨씬 귀엽고 부드럽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혼내는 부모님이 종종 쓰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어허, 가자미눈 하면 안 돼요.”
닮은꼴 물고기 삼 형제
가자미, 도다리, 광어
어쩌다 보니 가자미는 숨만 쉬어도 버릇없는 물고기가 돼 버렸네요. 가자미처럼 건방진 표정으로 오해받기 쉬운 물고기는 몇 종류가 더 있습니다.
그중 한국인이 가장 잘 아는 종은 국민 횟감으로 사랑받는 광어와 봄이 제철이라고 소문난 도다리입니다. 어찌나 비슷하게 생겼는지 인터넷 검색창에 이름을 입력하면 연관 검색어로 ‘다른 점’, ‘구분하는 방법’ 같은 어구가 뜰 정도입니다.
이 세 친구는 모두 희한하게도 입은 다른 물고기처럼 좌우 대칭으로 생겼습니다. 오직 눈만 한쪽 면에 몰려 있죠.
그래도 나름 그 한쪽 면 속에서 균형을 찾아 두 눈을 잘 배치할 수도 있을 텐데요. 이 친구들의 눈은 그마저도 아닙니다. 누군가가 기울여 놓은 듯이 한쪽은 위를 보고 다른 쪽은 옆을 보고 있죠. 이목구비가 자유분방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걸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이 친구들이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생기지는 않았습니다. 알에서 막 부화했을 때는 눈이 얼굴 양쪽에 하나씩, 좌우 대칭으로 달린 상태로 태어납니다. 그러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눈이 점점 움직이면서 한쪽으로 쏠립니다. 희한하죠?
납작하다고 다 같은 취급?
NO! 엄연히 다릅니다!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는 가자미, 도다리, 광어처럼 바다 밑바닥에서 생활하는 물고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가오리나 홍어 같은 종이죠.
이 친구들은 태어날 때부터 눈이 윗면에 가지런히 달려있습니다. 입도 수평으로 아랫면에 달려있죠. 조상부터 대대로 납작한 친구들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생김새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가자미, 도다리, 광어의 조상은 우리가 아는 보편적인 물고기처럼 몸을 수직으로 세우고 다녔습니다. 세 친구가 알에서 막 깨어났을 때 모습과 같죠.
본래 이렇던 종인데 진화하면서 눈만 점점 돌아갔기 때문에 입과 눈의 조화가 영 부자연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진화론을 만든 생물학자 찰스 다윈조차도 이들이 대체 왜 이렇게 어색한 모습으로 진화했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돌연변이? 생존을 위한 변화?
추측은 난무하고 근거는 전무
많은 생물학자 사이에 갑론을박이 오가던 도중 1933년 미국 유전학자 리처드 골드슈미트는 새로운 이론을 하나 제시했습니다. 갑자기 눈이 한쪽으로 몰린 돌연변이가 등장하면서 후손도 같은 모습을 물려받게 됐다는 주장이었습니다. 하지만 뾰족한 근거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과학계에서 정식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습니다.
반대로 진화가 여러 세대를 거쳐 천천히 이뤄졌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었습니다. 가자미, 도다리, 광어의 조상은 본래 다른 물고기처럼 수직으로 몸을 세운 채로 살았다고 했죠? 이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물고기가 바닥에 옆으로 벌러덩 엎어져 있으면 죽은 것처럼 보입니다.
‘천천히 진화설’은 바로 이 부분에서 반짝이는 설득력을 뽐냅니다. 물고기가 죽은 것처럼 누워서 살면 천적도 속이고 먹잇감도 속일 수 있습니다. 필요할 때만 움직이면서 목숨도 지키고 사냥도 효율적으로 할 수 있죠.
그래서 점점 누워 살기를 선호하다가 한쪽 눈이 바닥에 쓸리는 게 거슬렸을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바닥에 쓸리는 눈을 반대편으로 끌어올리는 진화가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 ‘천천히 진화설’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가설대로라면 진화 중간 단계에 있었던 조상은 눈 한쪽이 머리 위에 달려있었을 것입니다. 지금보다도 시야가 중구난방이라 무척 불편했겠죠. 생존에 유리한 게 없는 이 상태로 평생을 견뎌내야 한다니요!
영국 생물학자 조지 미바트는 1871년에 굳이 중간 세대가 이런 희생을 감내할 이유가 없다며 ‘천천히 진화설’을 비판했습니다. 게다가 중간 세대에 해당하는 화석도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진실은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졌습니다.
미궁 속에 빠질 뻔했던 비밀
2008년에 드디어 해답을 찾다
미국 시카고 대학교 대학원생 매트 프리드먼은 이 난제를 풀고 싶어 했습니다. 유럽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2008년에 광어와 비슷하게 생긴 암피스티움이라는 물고기 화석 여러 개를 CT로 스캔했습니다.
약 5000만 년 전에 존재했던 암피스티움은 놀랍게도 학자들이 상상만 하던 중간 단계 모습을 그대로 갖추고 있었습니다. 눈 한쪽은 정상 위치에, 다른 한쪽은 머리 위에 달려있었죠.
매트 프리드먼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오스트리아에 있는 빈 자연사 박물관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오랫동안 정체가 제대로 분류되지 않았던 물고기 화석을 또 찾았습니다. 이 물고기도 암피스티움처럼 한쪽 눈은 정상 위치에, 다른 쪽 눈은 머리 위에 있었습니다.
매트 프리드먼은 2009년 유명 과학 저널 ‘네이처’에 자신이 연구한 내용을 실었습니다. 오랜 논쟁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었죠. 네, 승자는 ‘천천히 진화설’이었습니다!
이후에도 관련 연구는 계속됐습니다. 2016년에는 중국, 독일 등 다국적 연구진으로 이뤄진 팀이 광어 유전자를 분석한 뒤 새로운 비밀을 풀어냈습니다.
이 팀이 과학 저널 ‘네이처 제네틱스’에서 발표한 바에 따르면, 광어 몸속에 있는 레티노산이라는 물질이 갑상샘 호르몬과 함께 작용해 변신을 시작하도록 만든다고 합니다. 앞으로는 또 어떤 연구가 물고기들의 비밀을 풀어낼지 궁금하네요.
‘좌광우도’ 공식만 알면 OK?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광어는 국내에서 활발하게 양식이 이뤄지기 때문에 사시사철 횟집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광어도 제철이 따로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죠.
광어 제철은 늦가을부터 겨울까지입니다. 알을 낳기 위해 겨울 동안 몸에 영양분을 쌓아 두기 때문입니다. 살이 오동통하게 올라 고소한 맛을 자랑하는 시기입니다. 봄에는 알을 낳은 뒤에 맛이 떨어집니다. ‘3월 광어는 개도 안 먹는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입니다.
반대로 도다리 제철은 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봄 도다리’는 ‘가을 전어’처럼 두 단어가 꼭 붙어 다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봄 도다리로 알고 먹는 생선은 사실 도다리가 아닙니다. 도다리쑥국에 넣어 먹는 이 친구의 정식 이름은 문치가자미입니다. 아니 어떻게 가자미가 도다리로 둔갑한 거죠?
도다리는 사실 한 가지 종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분명 한국 어류 대도감에 올라가 있는 ‘표준명’ 도다리는 단 한 종이지만, 한국인이 실제 생활에서 도다리라고 부르는 물고기는 다양한 종을 포함합니다. 문치가자미를 비롯해 또 다른 가자미인 돌가자미, 그리고 강도다리라는 녀석도 모두 도다리라고 불립니다.
생김새가 비슷한 광어와 도다리를 구분하기 위해 ‘좌광우도’라는 말이 생겨났는데요. 광어와 도다리를 정면에서 바라봤을 때 눈이 왼쪽에 있으면 광어, 오른쪽에 있으면 도다리라는 내용을 사자성어처럼 줄인 말입니다.
그런데 위에서 얘기했듯이 도다리는 다양한 물고기를 아우르는 말이기 때문에 이 공식이 항상 들어맞지는 않습니다. 강도다리는 도다리로 구분되지만, 광어처럼 눈이 왼쪽에 몰려 있습니다. 오랜 세월을 들여 어렵게 한 쪽으로 눈을 모은 물고기 친구들을 겨우 네 글자 단어로 구분할 수는 없는 노릇인가 봅니다.
잘 살기 위해 눈을 옮기는 고통도 감내한 물고기 친구들! 이제는 편안하게 모랫바닥을 누비는 모습 속에 이런 사연이 담겨있는 줄은 몰랐네요. 앞으로는 광어, 도다리, 가자미 얼굴을 보면 이상하다는 생각보다 대단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 것 같습니다.
더농부 인턴 방정은
제작 총괄 : 더농부 에디터 나수연
nong-up@naver.com
더농부
참고=
정훈, <과학드림의 이상하게 빠져드는 과학책>
한겨레, <넙치는 왜 넓적한가, 다윈 골탕 먹인 진화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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