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드 in 시네마> 기억의 ‘유통기한’을 말했던 영화 중경삼림, 하지만 이제는 ‘소비기한’?

* 이 글에는 일정 부분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음을 밝혀둡니다.

2022년을 끝으로 사라지는 ‘유통기한’

2023년부터는 ‘소비기한’으로 표기!

2023년 1월부터 ‘유통기한’이란 용어가 사라집니다. 마트에서 음식을 살 때면 유심히 살펴보는 항목인 만큼 의문이 생깁니다. 음식이 언젠가는 상할 텐데 이제 무엇을 봐야 한단 말일까요? 답은 ‘소비기한’입니다. 소비기한은 보관 방법을 지킬 경우 식품을 섭취해도 건강과 안전에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인정되는 기한을 이르는 말입니다. 식품이 제조된 후 시중에서 소비자에게 판매 가능한 기간을 뜻하는 유통기한보다 조금 더 긴 시간을 표시할 수 있습니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용어를 바꾸는 것과 관련해 “유럽연합(EU)을 비롯한 세계 다수 나라가 유통기한이 아닌 소비기한을 표기하고 있고 국제식품규격위원회도 소비기한 표시를 권고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유통기한이 지났다는 이유로 버려지는 음식물 쓰레기 처리 비용만 1조3천억원에 달한다는 점도 소비기한이란 용어를 도입한 이유로 꼽힙니다.

©게티이미지뱅크

유통기한 사라진다고 하니 떠오르는 영화

“내 사랑의 유통 기한은 만년” <중경삼림>

유통기한이란 단어가 사라진다고 하니 떠오르는 영화가 하나 있었습니다. “내 사랑의 유통기한은 만년으로 하고 싶다”라는 명대사로 유명한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Chunking Express, 1994)입니다. 홍콩 구룡반도에 있는 청킹멘션을 배경으로 삼아 2개의 에피소드를 102분간 이어가는 영화입니다.

유통기한과 통조림을 말하며 이 명대사를 남긴 곳은 첫 번째 에피소드입니다. 사복 경찰 ‘하지무’(금성무 분)와 마약 밀매 중개인인 ‘금발머리 여자’(임청하 분)가 주인공이죠. 참고로 임청하가 연기한 역할은 배역 이름이 따로 없습니다. 영화 정보 사이트에서도 ‘금발 가발을 쓴 여자(Woman in Blonde Wig)’로만 적혀 있을 뿐입니다. 편의상 ‘금발’이라고 칭하겠습니다.

<중경삼림> 스틸 사진. ©Block 2 Distribution

영화는 두 사람이 보내는 4일의 시간을 다룹니다. 1994년 4월 28일부터 5월 1일까지죠. 두 사람은 모두 곤란한 일을 겪은 상황입니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상황을 좋게 돌리려 나름대로 노력하지만 마음대로 풀리는 게 없습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몸과 마음이 지친 채로 마주하죠. 두 사람이 겪는 문제는 무엇일까요? 어떤 일이 있었길래 경찰과 마약 중개인이 마주하게 됐을까요? 또 유통기한은 두 사람과 어떤 관련이 있을지 이제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파인애플 통조림을 사는 남자

도망친 인도인을 찾는 여자

‘223’이라고 불리는 사복 경찰 하지무는 5년간 사귄 여자친구 ‘메이’와 헤어진 뒤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인물입니다. 이별의 이유마저 납득이 가지 않아 더 그러합니다. 메이는 하지무가 배우 미우라 토모카즈를 닮지 않았다며 결별을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하지무는 메이를 포기하지 못합니다. 메이의 단골 가게에서 들러 그녀를 기다리고 전화도 계속 걸어 보지만 메이를 만나지 못합니다.

전화하는 하지무. <중경삼림> 스틸 사진. ©Block 2 Distribution

사실, 하지무는 메이의 이별 통보를 농담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별을 마주한 날이 만우절이었기 때문입니다. 헤어지자는 이유도 이상했던 만큼 그는 억지로 마음을 다잡습니다. 그저 농담이 1달만 가길 바랄 뿐입니다. 한달 후인 5월 1일이 그의 생일인 까닭입니다. 하지무는 희망을 품은 채 메이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인 파인애플로 만든 ‘특별한’ 통조림을 사 모으기 시작합니다. 유통기한이 5월 1일까지인 것 말이죠. 그는 통조림 30개를 모은 다음에도 메이의 연락이 없다면 그녀를 깔끔히 잊겠다고 다짐합니다.

금발은 밀매해야 할 마약을 도둑맞은 상황입니다. 인도인들을 고용해 마약을 반출하려 했지만 비행 탑승 수속 직전 운반책인 인도인들이 도망쳐버리죠. 금발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자신의 보스가 운영하는 바를 찾아갑니다. 하지만 보스는 그곳에 없습니다. 점원으로부터 유통기한이 5월 1일까지인 통조림을 건네받았을 뿐입니다. 기한내에 일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메시지입니다.

어느새 찾아온 5월 1일

마주한 두 사람의 밤

4월 30일 새벽, 금발은 홍콩을 뜰 비행기를 예매합니다. 그리고 그날 하루 종일 자신을 속인 인도인들을 찾아다닙니다. 그런데 만나는 인도인들마다 알지 못한다고 말하네요. 늦은 밤이 되었지만 단서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인도인들이 그녀를 쫓으며 위협하기 시작하죠. 금발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인도인들을 총으로 쏜 뒤 달아납니다.

금발의 모습. <중경삼림> 스틸 사진. ©Block 2 Distribution

하지무는 4월 30일 밤 마지막 통조림을 사러 편의점에 갑니다. 하지만 유통기한이 지나기 직전인 통조림이 남아있을 리 없습니다. 점원에게 자신이 찾는 통조림을 말하지만 점원은 도리어 오늘 날짜를 아느냐고 되묻습니다. “내일이 기한인 물건은 꺼내 놓지 않는다”고 하네요. 이제 하지무가 질문합니다. “두 시간이나 남았는데 폐기 처분한다고요?” 점원이 당연하다는 듯 답합니다. “기한 지난 걸 누가 사요? 다 신선한 거 찾지.”

점원의 대답을 들은 하지무가 화를 참지 못해 점원에게 시비를 겁니다. “파인애플 한 캔에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 알아요?” 그는 파인애플 통조림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열거합니다. 마치 그의 지난 사랑이 이렇게나 장대했다고 설명하려는 듯합니다. 하지만 하지무의 상황을 알 리 없는 점원은 짜증이 납니다. “유통기한 따위 없었으면 좋겠어요.” 점원은 기한이 지난 걸 좋아하냐며 폐기할 통조림이 가득 담긴 상자를 하지무에게 안겨준 뒤 자리를 벗어납니다.

파인애플 통조림을 먹는 하지무. <중경삼림> 스틸 사진. ©Block 2 Distribution

다른 편의점에서 원하던 통조림을 산 하지무가 그간 모아왔던 통조림을 하나씩 먹어치웁니다. 메이를 기다려왔던 제 기다림의 유통기한이 끝났다는 걸 체감한 것 같습니다. 메이의 연락도 없습니다. 하지무는 자신이 메이에게 이 통조림처럼 끝나버린 사람이라는 걸 깨닫습니다. 결별을 인정한 하지무가 술에 취해 거리를 떠돕니다. 아는 여자들에게 전화를 걸며 술 주정도 부리죠. 그렇게 시간을 허비하던 하지무는 바에 들어간 뒤 처음으로 바에 들어오는 여자와 사랑에 빠지겠다고 다짐합니다.

마음을 다잡은 순간 한 여자가 바에 들어옵니다. 인도인들에게서 도망친 금발입니다. 금발은 위스키를 주문합니다. 하지무는 그런 금발을 쳐다보다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말을 겁니다. “혹시 파인애플 좋아하세요?” 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습니다. 그는 광동어부터 일본어, 영어로 재차 질문합니다. 대만어로 질문한 순간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가달라고 하네요.

금발에게 말을 거는 하지무. <중경삼림> 스틸 사진. ©Block 2 Distribution

하지만 하지무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계속 말을 걸며 수작을 부리죠. 그러면서 메이와 헤어진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중 바의 영업시간이 끝납니다. 지친 두 사람이 호텔로 갑니다. 호텔에 도착한 금발이 죽은 듯 잠듭니다. 하지무는 잠든 금발 옆에서 영화 2편을 보며 샐러드 4접시를 먹습니다. 햄버거와 감자튀김도 야무지게 먹습니다. 낡이 밝자 하지무는 자신의 넥타이로 금발의 구두를 닦아준 뒤 호텔을 떠납니다.

호텔을 떠난 하지무가 비를 맞으며 조깅을 하고 있습니다. 조깅을 하며 새벽 6시를 맞이할 생각입니다. 새벽 6시는 하지무가 태어난 시간입니다. 정말로 스물 다섯살 생일을 맞이하는 셈이죠. 그가 정해놓은 사랑의 유통기한이 다 하는 시점이기도 합니다. 이제 더 이상은 메이를 기다릴 수 없습니다. 조깅을 마치며 하지무는 삐삐를 버리기로 합니다. 오늘 그를 찾는 사람이 없을 것이란 생각에서죠. 그가 삐삐를 버리고 떠나려는 순간, 삐삐가 세차게 울립니다. 하지무가 공중전화로 달려가 전화를 겁니다. 예상치 못한 연락입니다. “702호실 친구의 메시지예요. 생일 축하해요.” 금발의 축하입니다.

사랑에 유통기한이 있다면?

하지만 언젠가 유통기한도 끝난다···

통조림의 평균적인 유통기한은 5년이라고 합니다. 하지무가 메이와 사귀었던 기간과 같습니다. 사람의 관계도 언젠가 끝날 수밖에 없다는 걸 말하려는 듯합니다. 통조림이 폐기되듯 기억과 사랑이 사라지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이겠죠.

생일 축하 메시지를 받은 하지무의 깨달음이기도 합니다. 영화의 끝 금발의 축하 메시지를 들은 하지무가 생각합니다. “만약 기억을 통조림이라고 친다면 영원히 유통기한이 없었으면 좋겠다. 유통기한을 꼭 적어야 한다면 내 사랑의 유통기한은 만년으로 하고 싶다.” 이제 하지무는 어떤 것이든 끝이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기억과 사랑에 유통기한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불가능하다는 걸 배웠습니다. 그렇기에 ‘만년’이란 긴 시간이지만 끝날 시점을 말한 것입니다. 최대한 오랜 시간을 간직한다 하더라도 그마저 끝이 있다는 걸 느꼈기 때문입니다.

호텔을 떠나는 하지무. <중경삼림> 스틸 사진. ©Block 2 Distribution

그리고 끝이 있다면 새로운 시작도 있다는 걸 알게 됐을 겁니다. 5월 1일 통조림을 다 먹은 하지무가 새로운 인연을 찾기 위해 집을 나선 것과 같습니다. 뚜껑을 열고 나서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맛봐야 통조림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생각처럼 맛이 좋아 계속 그 통조림을 사는 것도, 기대와 다른 맛에 새로운 통조림을 찾는 것도 사놓은 통조림을 먹고 난 뒤 가능한 일입니다. 언제 닿을지 모르는 메이의 연락을 기다리겠다 다시 마음을 다잡는 것도, 메이를 포기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려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조림을 비웠듯 메이와의 시간을 비웠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소비기한이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 같습니다. 음식의 목적은 먹는 것에 있습니다. 통조림을 보관할 수 있는 시간이 긴 것도 먹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서입니다. 그저 손에 쥔 채 시간을 보내다 통조림을 버리는 것보다 캔을 열고 통조림을 먹는 게 훨씬 의미 있는 선택이지 않을까요? 하지무가 파인애플을 먹고 새롭게 나아갔듯 말이죠.


FARM 인턴 김동희

제작 총괄 : FARM 에디터 박상익

nong-u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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